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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May 15. 2024

12시간만 지속된 엔도르핀

물들지 않는 삶




올해도 어김없이 큰 왕관을 뒤집어쓴 계절의 여왕 5월이  우리를 방문했다. 크고 작은 행사를 넌지시 던져준다. 이참에 마음을 나누고 선물을 챙기며 모났던 인간관계를 둥굴려본다. 자연스레 경제적 부담도 따라붙는다. 여왕님은 친절도 하시지 인간들의 역정을 생각하여 화려하지 않으면서 맑고 청명한 날씨를 덤으로 챙겨주신다.





먹잇감을 눈앞에 둔 사자처럼 쇼핑가에선  소비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건의 세일문자가 날아든다. 봄인지 여름인지 헷갈리는 그래서 마음까지 말랑해진 5월.  이듬해 전부터 미니멀라이프를 지향하며 야금야금 짐을 줄이고 쇼핑은 가급적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꼭 필요한 물건만 사고 소비와 절제의 균형을 맞추다 보니 부족함 없이 그럭저럭 편안하고 안온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던 와중 평시에 눈여겨 두었던 속옷브랜드가 세일을 한단다. ‘이참에 쇼핑 좀 해야겠어!’ 세일문자에 배고픈 사자는 지조도 없이 단번에 낚여버렸다.








속옷 2개만 사기로 단단히 합의를 하고 집을 나섰다. 도처에 깔렸을 다양한 유혹에 눈 돌리지 않기로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오픈전에도 불구하고 B3 주차장은 벌써부터 만석이다. 세일 때마다 느끼는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위대함’에 머리카락이 쭈삣 먼저 반응한다. 익살스럽고 부지런하며 악착같은 모습에 한 가정의 무사안일은 그녀들이 일구어 놓은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퀄리티 좋은 제품을 50% 이상 저렴하게 판매한다니 '오! 그래?' 하며 눈과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한켠에는 많이 주워 담으라  바구니가 즐비하게 솟아있다. 내 마음은 그 높이만큼이나  출발 전 딱 2개에서 출발 후 딱 5~6개로 단단하게 솟아있었다. '죽고 못 살 사랑도 변하는데 이 정도 물욕이야 쉽게 변할 수 있지 뭐.' 나의 뇌를 마취시키며 이것저것 주워 담다 보니 금세 산더미로 변한 바구니가 내손에 들려있다. 쇼핑을 자제하며 잘 살아왔는데 물욕에 대한 목마름이 이렇게 뿜어져 나왔다. '의지박약이 너무나 쉽게 노출되는구나!'




     

친정엄마 원피스 잠옷한벌, 남편 차르르 잠옷 한 벌, 찐 친구 홈웨어 한 벌, 딸아이  속옷 두벌, 내 것도 이것저것 담아보고.  조금 과한 명세표를 받아 들고 불필요한 물건은 없어 보인다며 나를 위로한다. 무너진 이성 탓에 지갑은 가벼워지고 쇼핑백은 그득이다. 식품매장과 리빙숍에 들러 메모해 간 식자재와 인테리어 용품을 사고  차 트렁크에 밀어 넣는다. 부실 체력은 신호를 보내온다. 무시할 수 없는 짧지만 강렬한 중독성 있는 사이다의 맛. 가끔이 주는 쇼핑의 맛이다. 이 맛에 끌려 과한 소비를 했더라도 너그럽게 보아주는 아량을 발휘해 본다.





  



집에 도착하니 오후 3시. 배고픔도 잊고 새로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한다. 속옷들은 애벌로 돌려 건조대에 널고 식자재들은 초고속으로 냉장고에 직행시킨다. 내 것보다 타인에게 깜짝으로 선물해 줄 생각에 피곤한 몸은 잠시 접어두고 커피를 내려 소파에 앉아본다.  커피를 홀짝이며 돈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새것이 주는 엔도르핀의 충분한 양을 빨아들인다. 기쁨과 행복과 신남을 주니 돈이 좋고 새것이 좋다. 새로운 물건으로 행복했으니 되었고 이것도 삶의 묘미다.




   

다음날 오후 어제 빨아 두었던 건조대의 속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축 늘어진 쭈글 해질 때로 쭈그러진 그들의 모습에서 경솔하고 과했던 엔도르핀은 부끄러워했다. 일주일은 갈 줄 알았던 물욕이 12시간 만에 소리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는 순간이다. 운동을 해도 12시간짜리 행복호르몬, 쇼핑을 해도 12시간짜리 행복호르몬이 분비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운동 후의 짜릿하고 감칠맛 나는 호르몬과 동급이라면.









모든 게 과잉인 시대, 언제부턴가 물건에 집착하고 짐에 눌려 사는 나를 발견한다. 필요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은데 물욕에 눈이 어두워 남들이 사는 물건 따라도 사고 안달도 내고 쉽게 내다 버리며 자제력을 상실하고 있는 나. 풍요로운 삶 속에서 이것저것 기웃거리다 삶은 버거워지고 정신은 피폐해지는 어딘가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욕의 과함이 집착으로 집착의 과함이 불행의 씨앗을 싹티워 낸다.




    

“돈과 욕망은 참으로 무서워요.” 고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의 일침이다. 돈과 욕망은 그것을 부풀리는 재미가 엄청난 중독성을  내포한다. 중독에 맛 들리면 만족할 수 없는 활화산 같은 삶을 살아야 하기에 많은 욕심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다가신 한 시대의 현인이셨다.




     

밀려드는 물욕의 파고 속에 '이게 다 뭐란 말인가? 채 12시간도 안 되는 찰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건 아닌가?'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 속에 한없이 높아진 눈과 욕심을  끌어내리지만 그들의 힘은 막상막하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만이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허우적대는 나를 보며 더 힘들어지기 전에 차단기를 내려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어수선한 마음으로 자리에 누워본다. 머릿속은 맛 들이지 않는 삶, 물들지 않는 삶, 새로운 문물에 적당히 반응하는 삶을 그려내고 있었다. 세상만사 사이클이 있다는데 어두웠다 밝았다 일렁이며 살다 보면 '잘살았다' 희망의 빛이 찾아오겠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숙면은 또 줄행랑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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