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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May 01. 2024

3만원 어치의 사랑

소소한 행복




2주 이상 주방 한켠에 살아 숨 쉬는 꽃들과 동거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내리며 웃어주고, 헤이즐럿 커피 향을 맡으며 웃어주고 커피를 마시며 또 한 번 웃어준다. 총 3번의 웃음. 꽃뭉치로 인해 굳어있던 얼굴 근육이 보기 좋게 줄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아침운동을 한다. 가뜩이나 웃을 일 없었던 얼굴이 웬일인가 싶게 좋아하는 눈치다. 하루도 빠짐없이 시원한 물로 폭풍샤워를 해주니 꽃들도 고마운지 자신만의 매력을 한껏 발산한다. 2주가 지나서야 찬연한 색깔을 뒤로하고 제 역할을 다한 꽃들은 힘겹게 고개를 떨군다. 그들과의 이별이 아쉬워 곱게 드라이플라워로 단장해 주방 한편에 보관 중이다. 2달째 생화로도 드라이플라워로도 사랑과 정주기 놀이를 이어가고 있다.





그들과의 인연은 블로그 이웃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블로그에 소소한 일상을 올리며 이웃들과 소통한 지 올해로 4년째에 접어든다. 늘 진솔하고 좋은 정보를 공유하는 이웃님이 어느 날엔가 꽃소식을 올려 주었다. 한 달에 한번 꽃을 정기 구독하며  느끼는 많은 감정들과 유익한 점들을 속속들이 소개해주니, 글을 읽으며 기회가 되면 '나도 한번 이용해 봐야지'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세상은 살기 좋아졌고 돈만 있으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음은 분명하다.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절 꽃다발 선물이라도 할라치면 직접 발품을 팔고 이쁘고 싱싱한 꽃으로 골라보지만 아무리 비싼 장미라도 일주일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농가에서 직접배송이 아닌 중간상을 거쳐 소비자에게 건네지다 보니 싱싱함은 많이 부족했다. 요즘은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산지직송 싱싱한 꽃을  당일에도 받아 볼 수 있으니 오래 살고 볼일, 편리한 세상임에 틀림이 없다.




   

이참에 서둘러 도망가는 봄을 가두고 싶어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다 마음에 드는 꽃집을 발견했다. 랜덤으로 7종이상 다양한 꽃을 한 번에 볼 수 있고 제철의 좋은 꽃을 저렴한 가격 3만원에 받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일본, 네덜란드등 해외에서 직수입도 하고 농가와 경매를 통해 직접소싱도 해서 고품질의 꽃을 출하한다 하니 잔뜩 기대를 하고 주문을 넣었다. 집으로 배송될 꽃이 어떤 꽃일지 가급적 나를 닮은 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24시간을 보냈다. 기대반 호기심반 설렘반 뒤범벅이다. 복권을 사면 일주일은 행복한데 꽃은 하루만의 행복이라 살짝 아쉽기는 하지만 어디 복권에 비할바인가? 복권에 비하면 꽃은 100%의 실물을 볼 수 있는 완벽한 확률게임이다. 100%의 현물에 행복도 웃음도 따라오니 일석이조의 투자라 확신한다. 





오전 11시 주문을 넣으니, 다음날 가공되지 않은 꽃들이  투박한 상자에 담겨 우리 집을 방문했다. 장미, 작약, 리시안셔스, 루스커스등 메인꽃에 잔잔한 꽃, 들러리 소재까지 골고루 보내왔다. 생각보다 많은 양에 오래 두고 보아도 좋을 꽃들로 구성되어 흡족해하며 물꽂이를 해 주었다. 나를 닮은 꽃보다 나를 닮은 색감의 꽃무덤이 온듯했다. 튀지 않으면서 뒤에서 수줍게 미소 짓는 아이보리 색채들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다음날 아침 그들은 벌써 우리 집에 적응을 했나 싱그럽게 물먹음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서울에 있는 딸아이를 만나러 가는 날. 서둘러 이쁜 꽃들로만 조합해 뚝딱 꽃다발 하나를 만들었다. 만드는 나도 기쁘지만 꽃을 보고 좋아할 딸아이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입꼬리가 성화를 해댄다. 사랑을 가득 품은 한 상자의 꽃으로 나의 일상도 채워보고 딸에게 표현하지 못한 수줍은 사랑도 전해 보는 넉넉하고도 가성비 높은 일을 해낸 하루였다.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제부가 문자 한건을 보내왔다. 3만 원짜리 치킨 교환권과 함께 발목수술 후 좀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따스한 응원의 메시지도 겸해왔다. 기대하지 못한 마음씀과 배려에 가라앉았던 오후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촐싹거리며 바로 제부에게 '고맙다는 메시지와 건강해지면 강릉으로 놀러 가겠다'는 입찬소리를 해놓았다. 뜻하지 않은 그의 정성에 인생의 참맛을 맛보는 오후의 한 자락. 사는 게 뭐 별 건가? 욕심부리지 않고 내 형편에 맞게 내 분수 것 누리며 살면 그만이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때로는 자주, 때로는 무심한 듯 그리움 가슴에 품고 웃으며 살면 그만이지. 상처 주고 상처받는 날이 있을지라도 서로 이해하며 역지사지, 측은지심 마음 갖고 살아가면 그만이지... 오늘은 3만원으로 참 많이도 행복한 하루였다. 나도, 딸아이도, 제부도 우리 모두 행복했을 하루다.








요즘은 사랑에 목이 마르기도, 집착하기도, 많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랑받아본 경험이 희미해서 그런가 싶다. 부모님을 원망할라치면 그분들도 사랑받아본 경험이 없으니 사랑을 표현할 수도 줄수도 없는 형편이었을게다. 자녀와의 갈등에도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사랑이 결핍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도 나도 아이들도 무수히 많은 타인들도 사랑이 부족한 상태에서 저마다의 사랑을 갈구하며 살아가고 있다. 꽃무덤이 물을 필요로 하듯 우리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마음만 내어주면 물건값과 상관없이 저 작은 물건으로도 농축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평생 주고받을 사랑이기에 바닥나지 않게 적당한 수위 조절을 하며 사랑과 행복이 덤으로 딸려올 수 있게 일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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