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시 Apr 17. 2024

구호물품이 도착했습니다

찐 우정




‘띠리링~’ 오전 나절 우체국 택배에서 문자 알림이 왔다. 현관문을 빼꼼히 여니 큰 세제 박스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생일이 다가오니 40년 지기 베프가 또 무언가를 챙겨서 보낸 것이 틀림없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을  한해도 거르지 않고 커다란 택배상자로 위로해 주는  유일한 친구, 그녀가 분명하다. 한 달 전 알림도 없이 정혜*로 소인이 찍힌 냉동떡상자가 배달되어 확인도 안 하고 수화기부터 들었었다. “너 왜 이런 걸 보냈어?”하고 큰소리로 말했다 서로 과하게 무안했던 기억. 이름의 끝자리만 다른 막내동생이 보낸 것을 그녀로 착각해 벌인 우발사고였다. 이번엔 100% 확신을 가지고 택배상자를 열어젖혔다.





반백의 아줌마는 선물을 좋아한다. 새치머리 흩날리며 어린이날 선물이라도 받는 듯 마음이 벌써부터 쿵쾅쿵쾅 지진 나기 일보직전이다. ‘이번에는 무엇을 보냈을까?’ 호기심 어린 눈을 마음껏 열어젖히고 박스를 개봉한다. 선물과 칭찬은 나이와 상관없이 어른이에게도 시든 꽃잎에 물뿌림 역할을 톡톡히 하나보다. 어린 시절 받아본 기억이 많지 않은 나는 그녀의 선물 공세가 나쁘지 않다. 가끔은 그녀에게서 엄마의 둔탁한 치맛자락 냄새를 맡기도 한다. 요즘은 그 맛에 취해 선물을 연구하고 선물의 의미를 되새기고 선물을 주고받는 취미의 경지까지 이르렀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할 텐데.. 선을... 넘을 때가 더 많다.





아이스팩에 둘둘 쌓인 포장지부터 눈에 들어온다.  30년이 지나도 변함없이 똥손인 나를 위해 파김치, 열무김치, 호두조림, 무말랭이무침에 된장까지 푸짐한 한상차림을 해서 보냈다.  작년에 보내준 W시 특산품 쌀국수국물이 맛있다고 한마디 했더니 잊지 않고 또 사서 보내주었다. 관심을 갖고 기억해 준다는 것은 수면밑 깊고도 깊은 가늠할 수 없는 사랑이리라. 내가 딱 좋아할 스타일의 고가의 베이지색 원피스도 보내왔다. 그녀는 비싸서 못 사 입을 원피스를 날 위해 무리해서 사서 보냈을 것이다. 역시 나의 취향을 너무도 잘 아는 그녀. 친정엄마나 가족들조차  신경 쓰지 못하는 세세한 부분들까지 관심 있게 보고 들었다 세세하게 챙겨서 보내졌을 구호물품들.








올해도 어김없이 가족 단톡방에 사진을 찍어 올리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오매, 부럽지? 친구사랑 듬뿍 받는 나 이런 여자야."라고 너스레를 떨어본다. 남편은 내심 남자들은 따라 할 수 없는 그녀와의 돈독한 우정에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아이들에게는 의도적으로  이런 상황을 노출시킨다. 케익에 촛불과도 같은 친구의 소중함을 단단히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손수 보여주고 실천함으로써 그들도 평생 내편이 되어줄 소중한 친구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에 오늘도 격하게 메시지를 날려댄다. 금세라도 손만 내밀면 베일 것 같은 날카로운 세상. 나의 마음하나 포근히 감싸줄 친구, 지친 몸 쓰러질 때 두툼한 어깨 거침없이 내어줄 수 있는 동무를 그들 곁에 두었으면 하는 간절한 어미의 바람에서다.





“비싼 물건 받아서 부담스럽지 않아?” 퇴근하자마자 택배상자를 보며 남편이 내뱉은 말이다. 원피스 가격을 보고 내심 걱정이 되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본다. “아니, 돈보다는 선물을 챙기는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전혀 부담스럽지 않아.” 나의 단호하고도 확고부동한 대답에 더 이상 의구심을 품지 않는다. 그랬다. 그녀와 나는 전생에 엄마와 딸이었나 싶을 정도다. 그녀는 W시, 난 Y시에 살며 기념할 일이 있거나 생각날 때마다 애틋하게 서로를 챙긴다. 자주 만나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우리만의 리듬을 지키며 서로를 위로하고 우정을 쌓아나간다. 천생 여자인 그녀, 반쪽도 따라가지 못하는 중성 비스꾸리한 나. 모양은 정 반대지만 다름에 이끌려 40년 우정을 이리도 끈질기게 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에 가장 큰 고비를 넘길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수 있었던 친구다. 좁디좁은 어깨를 마음껏 누리고 비빌 수 있게 한치의 망설임 없이 내어 주었던 친구다.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조차 말 못 할 고민을 차분하고 현명하게 들어주었던 친구다. 참 많이도 고맙고 소중한 친구다. 친구복은 타고난 것이 분명하다.





살아가면서 내편이 있다는 건? 잡을 수 있는 손과 기댈 어깨, 비빌 언덕이 있다는 건? 그것은 분명 부풀 대로 부픈 밀가루 덩어리 속 적당히 달짝지근한 앙꼬와 같은 폭신한 맛이랄까? 앞으로 살아갈 세월 소소한 일상을 들기름으로 버무려줄 참동무들과 함께 하고픈 생각이 강하다. 그들에게 시간, 돈, 마음, 정성을 더 내어 주어야 한다. 참동무의 전제조건은 '양방향성'이다. 혼자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함께 해야만 이룰 수 있는  절대 경지의 복중에 복이다. 오늘도 '함께 투게더~'를 적당히 외치며 나만의 리듬으로 나만의 속도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 중이다. 진심은 통하게 되어 있고 멀고 길게 끈끈하게 가려면 단단하게 머리에 갈무리해 두어야 한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내 마음이고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진실하고 살가운 마음뿐이다.






입신양명에  값비싼 물건을 많이 소유한다고 성공한 인생이라 말할 수 있는가? 살아가면서 물질적 성공이 인생의 성공은 아니다. 행복의 첫째 조건이 관계에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가는 나이다. 다행이다. 그녀로 인해 물욕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인생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 그녀.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내어 주어도 아깝지 않은 그녀. 아플 때 내 모든 것을 내어 주어도 아깝지 않을 그녀. 그 단 한 사람. 그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무릇 행복한 삶이 아닐까?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나도 덩달아 살랑살랑 날아본다.

실실 살아도 실실 웃어도 눈부신 4월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전 02화 서울을 떠나 버렸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