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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Apr 03. 2024

당신 지금 가고 싶은 곳이 있나요?

또다시 갑사




7~8년 전 갑사 템플스테이에 참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새벽 4시 잠이 덜 깬 채 스님과 단둘이 새벽예불을 올렸다. 연신 쏟아져 나오는 입김을 뒤로하고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에 맞춰 108배를 끊임없이 했던 기억. 양볼과 양손이 얼얼하게 얼어가도록 간절하게 소원한 게 무엇이었던가?  짙은 어둠을 휘갈기는 타종소리에 새들도 나무들도 나도 스님도 아침을 맞이했다. 예불을 마치고 움츠러들 대로 작아진 몸을 하고 절간을 한 바퀴 돌자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스산한 마음이 따스하게 녹아내렸던 기억. 모든 소원을 다 품어줄 것 같은 살아 움직이는 힘에 이슬처럼 영롱했던 마음이 있었다. 이맛을 잊지 못하고 오늘도 나는 갑사로  향한다.




어젯밤 법륜스님의 "깃털처럼 재밌게 살라"는 말이 뇌리에 꽂혀 실행에 옮겼다. 무적의 추진력을 자랑하는 딸내미 흉내를 조금 내어볼 작정이다. 내비게이션은 갑사 가는 길, 오전 7시, 135Km라 친절히 일러 준다. ‘뭐 이 정도쯤이야, 아직은 거뜬하지.’ 나의 뇌를 적당히 세뇌시킨다. 장거리 여행은 남편과 함께 할 때 보다  혼자 일 때 약간의 긴장감을 필요로 하지만 부처님 뵈러 갈 때는 이마저도 느슨하게 누그러진다. 혹시 사고가 나더라도 부처님 뜻에 나의 목숨을 내어 주어도 좋다는 생각. 그만큼 그분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다는 단단한 마음일 게다. 오늘도 힘차게 시동을 걸어 본다. 출발~~~




마음이 허해 올 때면 온전히 내 마음을 찾으려 애써 갑사행을 택한다. 그곳은 내게 세상의 모든 상념과 찌꺼기들을 일순간에 녹여주는 곳이다. 약간의 찬기운을 등에 업고 나선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 않다. ‘그래, 뭘 그리 무겁게 살아, 사는 것도 힘든데 가볍게 오늘을 살자.’ 중얼중얼 나의 준비 안된 추진력에 기름칠을 듬뿍해댄다.








금요일이라 고속도로는 엉거주춤. 정안 알밤휴게소에 들러 예민한 마음을 녹여줄 부드럽고 따스한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한 모금 들이키니 목을 휘감는 부드러움과 고소한 향이 나를 단단하게 잡아준다. 커피 덕분일까 혼자서 하는 여행치고 꽤 근사한 마음마저 든다. 잠시 주변을 둘러 공주의 시원한 공기를 눈으로 코로 입으로 온몸으로 잡아당겨 본다. 분위기가 상쾌한지 내 마음이 상쾌한지 무릇 상쾌하다.




초입의 산등선은 기다란 입을 하고 언제라도 나를 품어줄 기세다. 길옆의 풍경은 봄기운이 기세를 부리다 말고 4월의 황매화 축제만 기다리는 듯 황량하기 그지없다. 축제만 피해 거칠고 메마를 때만 찾아다니는 나는 불량고객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다녀가야 이곳도 봄으로 온전해지니 4월이 가기 전에 서둘러 찾아든다. 발걸음이 가벼워 아래를 내려다보니 가장 편한 신발에 가장 아끼는 양말을 신고 있었다. 부처님 뵈러 온다고 갖은 모양새에 갖은 마음은 다 하고 있었다.  '그랬구나, 갑사는, 부처님은 내게 이런 존재였구나.' 비빌 언덕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세상을 등지지 않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추운 겨울을 굳건히 보내고 봄기운에 살짝 고개를 내민 여린 새순은 낡지 않은 새로움으로 우리를 반겨준다. 사천왕문을 대신해 물소리 새소리가  먼저 내려와 인사를 한다. 나도 덩달아 '잘 있었냐'고 나지막이 반가움을 표시한다. 대부분의 절은 깊은 산속 명당자리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 산세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만하다. 새소리, 물소리 상념의 소리들이 속세의 찌든 마음과 뒤엉켜 말끔히 씻겨 나간다. 대웅전에 도착하기도 전 내 머릿속은 벌써 맑은 시냇물이다. 부처님 뵙기도 전에 이를 어찌하리. 커다란 세분의 불상을 마주하며 먼지 쌓인 내 마음은 일렁이고 출렁거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부처님께 삼배 올리고 잠시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마구 쏟아낸다. 넋두리도, 소원도, 감사함도 모두 토해낸다. 조금은 벅차시겠지만 착한 마음 내어놓고 실실 살아가는 중생이 왔으니 '어여삐 보아주시지 않을까'하는 믿음에서다. 경내에 들러 물 한 바가지 마시고 살랑거리며 처마 끝서 교태 부리는 풍경의 수줍은 미소도 보아주고 구름 몇 점 하늘도 올려다본다. 일상에서 누릴 수 없는 호사를 엄마의 품이라도 된 듯 넉넉하게 품고 있는 갑사에서 누려본다. 간간이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를 하며 절간을 나선다.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밖에, 동지애를 느낄 수밖에 없는 공통의 분모인 이곳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기념품가게를 기웃거리다 단숨에 참새로 빙의해 활짝 웃고 있는 동자승 2명을 봉투에 밀어 넣었다. 이번에 동행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은돌이, 은순이로 지을 예정이다. 오늘따라 주차장까지의 거리는 왜 이리 짧게 느껴지는가?








살아있음이란 편안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유로움 이리라. 고되고 힘들 때 잠시 멈춰서 나의 발밑을 내려다볼 수 있는 여유.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오늘의 삶이 좋다. 어딘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크나큰 행복이다. '인생은 잠깐이고, 살아 있는 날을 죽은 자처럼 살기 싫을 뿐’이라는 김남준 작가님의 글이 깊이 파이는 하루다.




부드러운 커피의 향도, 새소리도, 목탁소리도 참 좋았다. 무사히 집에 도착해 매운 어묵김밥을 만들었다. 맛이 짜다. 기운이 너무 뻗쳤나? 그래도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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