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후회
한적한 토요일 오전. Y시를 벗어나 시원하게 용서고속도로, 구룡터널, 대치동을 지나 강남구 삼성동으로 입성한다. 숨 막히게 빼곡히 들어선 빌딩숲사이로 고가의 아파트단지들이, 딸아이 회사가 보이고 낯익은 숙소가 눈에 들어온다. 한껏 편안한 자세로 재잘거리던 입은 급하게 꼬리를 감추고 표정도 덩달아 식어 버렸다. '이곳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라는 자책감으로 또다시 현기증과 우울감이 밀려든다. 고가의 빌딩과 아파트 사이에 내가 비빌언덕은 전혀 없는, 마음만 먹으면 서울로 되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닌, 느지막이 느끼는 상실과 허무의 무게는 상당했다. 공기는 탁하고 숨 쉴 틈조차 내어주지 않는 곳이지만 내가 살집이 강남의 한 복판이었으면 하는 '죄 없는 욕심'을 마구 내어보지만 바람은 바람으로만 끝날 판이다.
탁한 공기와 환한 불빛덕에 잠을 설친 딸아이가 창백하고 퀭한 얼굴로 내려왔다. 겨우내 맡겨놓은 몬스테라를 분갈이해서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려 이곳으로 향했다. 강한 비바람에도 씩씩하게 잘 자라주는 기운을 듬뿍 담아 그녀에게도 전해지길 바라며 건네주었다. 그녀는 몬스테라를 보자 이쁘게 활짝 웃어주었다. 한결 놓이는 마음을 마주하고 화초를 햇빛이 잘 드는 창문 한켠에 놓아주고 시댁이 있는 구의동으로 차를 몰았다.
결혼초 구의동서 5년을 살고 아파트 입주와 함께 Y시로 이사를 했다. 주말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시댁에 내 시간, 내 의견을 반납하고 살았으니 모든 것이 주도적인 나의 일상에 큰 바위돌 하나를 안고 사는 기분이었다. 하루빨리 시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나의 최대 목표가 되었고 과녁은 그리 오랜 지나지 않아 내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제비가 박씨라도 물어다 준 착각을 하며 유유히 구의동을 탈출했다. 훗날 크나큰 재앙로 나를 덮칠 줄이야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날수록 서울과 경기권의 집값 차익이 벌어지면서 뒤늦은 후회를 쓸어 담고 있는 중이다. 시골내기가 고향이 그리워 서울을 등졌으니 남편에게는 넋두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구의동 인근에 살던 고향친구는 몇 해 더 살다 건대입구 쪽으로 이사를 해서 아파트를 장만했고, 바로 옆집에 살던 단비엄마는 알뜰살뜰 정성껏 살아 인근의 단독주택을 매입했다. 내게는 고향친구나 단비엄마가 떼부자고 서울사람이고 부러움의 대상이다. "자기야, 우리도 서울에 눌러앉았으면 어땠을까? 벼락부자 됐을까?" "니 성격에 힘들었겠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그는 역시 나의 남편이었다.
구의동을 지날 때면 아이들을 낳고 신혼을 보낸 곳이라 설렘과 풋풋함이, 아차산 기슭을 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다. 가끔은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지나갔으면'하는 애꿎은 원망을 해본다.
어느새 시댁에 도착했다. 원망을 벚꽃잎에 묻어버리고 어머니랑 형님네랑 장어구이 맛집으로 향했다. 씁쓸한 마음을 여러 마리에 두툼한 장어로 얼버무릴 작정이다. 왜소하신 어머니가 잘 드시니 간만에 흐뭇한 마음 내어본다. 식사를 마치고 가끔 들르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정성껏 구운 눈꽃을 닮은 수제 쿠키를 덤으로 내놓으신다. 어머니는 생각지 않은 호의에 작은 입을 활짝 벌리시고 “고맙습니다”하신다. 주인장의 마음씀에 모두가 감사하고 기쁜 하루. 케이크로 생신상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집을 향해 나섰다.
분당수서간 고속도로를 지나며 또다시 짧은 상념에 잠겼다. 돈과 행복을 맞바꾼 삶. 결혼하고 아이 낳고 30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바쁘고 치열하게 사느라 후회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전반전을 물 흐르듯 편안하게 살았기에 50대 이후는 더욱 편할 거라 안일한 생각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살아가야 할 시간이 늘어나면서 돈과 건강에 대한 걱정이 조금씩 불어나는 것도 현실이다. 후회를 안 한다면 거짓일 게다. 나의 마음을 기만하는 것이다. 뒤늦은 후회 앞에 '이번생은 사는 것도 처음이고 돈보다 행복이 조금 더 앞서가는 삶인가 보다.'라고 나를 든든하게 에워 쌓아본다.
서수지 톨게이트를 빠져나오니 서울과 비교할 수 없는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나의 코를 자극한다. 저 멀리 바람이 술술 잘도 통할 것 같은 널찍하고 웅장한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한적하니 공기도 맑고 주차장이 여유로워 14년째 이곳 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다. 집에 도착하니 14살 된 노견이 꼬리를 흔들며 나른 반긴다. '그래 내 집이 최고지 뭐. 암만.'
행복한 사람은 있는 것을 사랑하고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을 사랑한다고 누군가는 말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