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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Apr 24. 2024

중간만 가도 괜찮아요

중년의 성적표




인생 전반전 성적표를 내보았다. 81점이다. 10대 유년시절 야생의 숲에서 꽃이랑 강아지랑 송아지랑 마음껏 뛰어놀며 시골스럽게 자랐으니 15점. 20대 청춘의 파스스한 떨림을 빗소리와 책향기로 얼버무렸으니 15점. 30대 결혼과 동시에 무겁게 짓눌린 어깨를 간신히 떠받치고 아득바득 살아냈으니 25점. 40대 단거리 경주인양 온 힘을 다해 질주하다 한순간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으니 10점. 일어서야지 일어서야지 하면서 도무지 듣지 않는 몸뚱이와 몽롱한 정신상태로 여기까지 왔으니 16점. 전반생을 도합 81점으로 푸짐하게 마무리해 본다.





그럼 후반전은 어떻게 설계를 해야 하나? 81점 이상을 받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가장 중요한 기초체력부터 비상등을 깜빡이니 양심상 점잖게 70점으로 꼬리를 내려본다. 50대 이전은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 교육, 재산증식에 에너지를 쏟아부었다면 50대 이후는 건강, 인간관계, 의미 있고 행복한 삶, 균형 잡힌 재산 분배에 의미를 두고 아름다운 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재설계해 본다.





젊은 시절에는 상대방의 눈치도 보고, 경쟁, 욕심, 안달, 인정, 평가 등에 목말라 있었다면 중년 이후의 삶은 사랑, 배움, 호기심, 베풂, 웃음, 내어줌 이런 것들로 오붓하게 한 상 차려볼 생각이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고 몸과 마음은 수렁을 헤매니 무기력이란 단어가 친근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그러면서 나를 참 많이도 아프게 할퀴어댔었다. 사람은 건강한 몸으로의 삶도, 건강한 정신으로의 삶도 함께 살아내야 한다. 서랍 속 숨겨두었던 아픔의 상흔들. 이제는 과감히 꺼내어 유쾌하고 발랄한 순간들로 변모시켜주고 싶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탄탄한 노후도 기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후한 점수, 그럴듯한 재설계로 밀려드는 불안을  잠재워 보지만 '가랑잎으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모양새다. 유례없는 장수시대  곁눈질 할 새도 없이 앞만 보고 가기엔 호기심과 두려움의 연속이다. 눈뜨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용기 내어 스템을 밟아보지만 엇박자로 끝이 난다. 자라온 환경이 사뭇 다른 MZ세대 자녀들과 이해심 충돌로 시시각각  불꽃 아닌 불꽃경쟁을 하고 있다. 벌어진 틈사이로 한숨과 섭섭함이 교차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정성을 다해 기르고 노후에는 ‘자식 덕에 호강 좀 하자’를 떠올렸다 ‘아뿔싸, 이건 아니구나!하고 뒤늦은 현실감각을 느껴본다. 지금의 중년은 아프고 흔들린다. 지금의 MZ세대도 아프고 흔들리긴 매마찬가지다. 이런 현실 앞에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서 있을 중년이 얼마나 되겠는가?

 




되돌아보니 열심히 달려왔음에도 중년의 성적표는 낮은 포복자세를 유지한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 2등은 안중에도 없고 과정을 뛰어넘어 결과만 부각되는 현실 앞에  사부작거리는 몸짓은 공중분해되어 산산이 부서진 느낌. 반길 새도 없이 꾸역꾸역 눈치 없이 달려든 초라함과 상실감이란 녀석들. 밀어내려 해도 거세게 달려드니 보기 좋게 한 방 맞았다. 내려가는 길엔 열정과 자신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포기와 안주만이 나를 잡아끈다. 체력도 바닥을 향해 가는데 차라리 잘된 일이다. 굳이 잘할 필요도, 남을 의식할 필요도 없이 내가 만족하고 담백하게 살아내면 그만이다. 마음껏 짐을 내려놓으니 삶의 모든 순간이 ‘잘’에서 ‘실실, 적당히’로 급선회한다. 고해의 바다를 보란 듯 눈물 2스푼, 웃음 8스푼으로 반격할 절체절명의 순간이 온 것이다.





“360명이 한 곳만 바라보고 달리면 1등에서 360등까지 순위가 매겨져요. 그런데 360명이 각자 목표한 대로 달리면 모두가 1등이에요. 모두가 다른 사람이고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데 왜 남의 눈치를 보고 따라가려 합니까?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것이에요.” 고 이어령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시간의 유한함과 삶의 실체를 알아서일까? 아님 나에 대한 환상을 떠나보내고 현실을 직시해서일까? 그토록 열망하던 1등의 자리를 초연히 내려놓으니 중간등수도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안목과 식견이 생겨났다.








인생 재설계는 한 인간이 묵혀두었던 껍질을 탈피하고 새로이 단장하는 리모델링 작업이다. 새로움이란 전과 다른 산뜻하고 상큼하고 푸르른 맛일 게다. 누군가의 엄마도, 누군가의 아내도, 누군가의 며느리도, 누군가의 딸도 아닌 오롯이 나 자신만을 위한 인생 재설계를 구상한다.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 여전히 거친 사자가 되기도 순한 양이 되기도 하지만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자'는 욕망엔 거침이 없다. 전반전에 소리소문 없이 다가와 준 인생 한방을 후반전에도 염치없이 기대하면서 말이다.





누군가는 인생, 전세도 아닌 월세살이 가볍게 살라고 한다. 남들과 비교하고 경쟁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제법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제법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를 묵묵하게 채워준 시간들은 결코 헛되고 헤픈 시간들이 아니었다. 남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보다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으로, 세월의 흔적 앞에 속수무책 무릎 꿇어 보이지만 허허실실 웃으며 '괜찮아, 괜찮아'를 남발하는 나를 보고 있다. 배낭을 다시 꾸려본다. 커피 한 모금과 삶은 달걀 2개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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