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시 May 22. 2024

임을 향한 볶음밥

음식이 주는 위로




"자기야, 볶음밥은 언제 해주나?"

"또 시작이야. 안 돼, 혼나."

환갑상을 받은 지 제법 지난 허니씨(남편 애칭)는 오늘도 볶음밥 타령이다.




     

노란색 달걀지단에 빨간색 하트모양을 한 추억의 야채 볶음밥. 아이들 어렸을 때 참 많이도 했었다. 해본지가 하도 오래되어 가물가물한데 3개월째 졸라대고 있다. 냉장고를 열어 갖은 야채를 다지고 아이들이 좋아했던 햄도 추가했다. 버터를 두르고 야채를 빠르게 볶다 고슬고슬 갓 지어진 흰쌀밥을 투하하고 적당히도 야물딱지게 간을 한다. 달걀지단은 널찍하게 부쳐내고 볶음밥은 동그랗게 말아 지단 위에 올려놓고 김밥처럼 돌돌 말아낸다. 허니의 마음을 홀리기 위한 오늘의 특단의 조치. 돌돌 만 밥 위에 하트모양을 그리고 HK 그분의 이니셜을 찍어내면 오늘 요리 끝이다. 똥손인 내가 음식의 맛으로 승부하는 건 백전백패고 사랑과 정성만 담은 맛으로 승부하는 건 백전백승이니 해볼 만한 한판이다.



  

 

퇴근 무렵  늘 차려놓았던 저녁상은 비워 놓았다. 허니씨에겐 3개월에 목 빠짐을, 나에겐 튕기는 맛을 제대로 선사한 일품요리 대접을 깜짝 파티로 위장해 볼 생각이다. 오늘은 보통과 다르게 어두운 얼굴로 퇴근을 했다. 조금은 힘들었을 하루를 내비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미리 준비한 음식을 바사삭 차려낸다. 볶음밥을 본 허니씨는 환하게 웃으며  ‘어쩐 일이여?’ 한다. 어두운 표정이 마음에 걸려 대본에도 없던 레드와인을 꺼내든다. 남편을 향한 오늘의 최상의 서비스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레 하트모양의 볶음밥은 자취를 감추었다. 음식 하는 사람이 주인이다 보니 느끼한 맛보다 담백한 맛에 끌렸고 먹어주는 사람이 없으니 추억의 볶음밥은 내 손에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몇 년을 잊고 지내다 요즘 들어 부쩍 볶음밥 타령하는 허니씨를  위해 온기 가득한 음식솜씨를 발휘해 본다. 그는 요사이 아이들이 분가하고 갱년기까지 껴안으며 헛헛함을 꾸역꾸역 감내하고 있었다. '조용해진 집에서 북적대며 소란스레 먹었던 아이들과의 추억이 담긴 그 음식이 생각났던 걸까?' 퇴근해서 짠하고 나오는 음식도 그리웠을 테고 다 같이 둘러앉아 밥 먹던 시간도 그리웠을 테다. 나는 6시에 저녁을 먹고 그이는 8시에 저녁을 먹으니 그리움도 외로움도 함께 먹는듯했다. 그 마음을 알기에 볶음밥 만드는 게 더욱 신경 쓰이고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음식은 삶의 위로요 온기다. 음식은 아련한 추억이고 그리움이고 사랑이다.음식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니 음식은 그 사람을 대표하기도 한다. 어떤 이와 음식을 먹을 땐 즐겁고 속이 편하다. 또 다른 어떤 이와 음식을 먹을 땐 미간이 찌푸려지고 소화제가 필요하다. 인간관계의 척도를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 음식이다.





강원도에 계신 친정엄마는 고슬고슬한 감자밥에 구수한 된장국, 숯불에 앞뒤 지글지글 구운 고등어구이가 일품이다. 소박하면서 강인한 동백꽃을 닮은 맛이다. 첫아이 산후조리 때 서울에 계신 시어머니는 사골국물에 양지머리 듬뿍 넣고  조미료로 며느리 사랑까지 톡톡 얹어 진한 미역국을 끓여 주셨다. 어찌나 진하고 쫀득하고 맛있던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이 난다. 다정한 맛이다. 허니씨는 차분한 성격답게 달걀프라이를 일품으로 빚어낸다. 언제나 그에게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하고 익숙한 맛이다. 친정 언니는 산나물을 그리운 맛으로 쑥닥 무쳐낸다. 그러고 보니 음식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은 ‘엄마 하면 떠오르는 음식이 있나요?’라는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엄마에 대한 그리움, 아련함을 어떤 음식으로 표현해 줄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음식에 관심도, 음식 하는 시간도 아까워하는 나에게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듯하다. 시간 날 때마다 요리 프로그램 시청하기. 음식 만들기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지만 행복한 미래를 위해, 가족을 위해 기꺼이 투자해 보기로 한다. 친정엄마가 해주었던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담아 남편과 아이들에게 전해주었고, 다시 그 아이들은 예쁜 기억을 담아 그들의 아이들에게서 고스란히 전해줄 것이다. 그렇게 사랑과 추억이 담긴 음식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1%의 손맛과 99%의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







요즘 젊은이들은 '행복보다 돈에 더 열광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고도성장 사회에 우리가 만들어낸 ‘돈이 최고야’라는 자화상이다. 우리의 마음밭은 이미 사막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살다 보면 누구나 속이 탈 것처럼 아플 때가, 너무나 힘에 겨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받아 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날엔 뜨끈한 국물에 소주 한잔이, 때론 엄마가 생각나기도 한다. 당신은 이럴 때 어떤 사람이, 어떤 음식이 생각나는가? 있다면 잘 살아왔고  행복한 사람이다. 마음 통하는 이와 함께하는 따스한 밥은 정이고 사랑이고 믿음이다. 속이 풀리면서 없던 힘도 쭈삣쭈삣 솟아나게 하는 음식만이 주는 힘이다. 음식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여유도 챙겨준다.





오늘 내가 만든 찌그러진 볶음밥엔 남편을 향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을 함께 버무려 넣았다. 아니 그를 향한 미움도 살짝 한 움큼 집어넣었다. 그래야 제맛이 난다. 힘겨웠을 하루를 장대비처럼 싸그리 씻어 냈으면 하는 바람도 넣어본다. 음식이 주는 일상의 위로를 단단히 맹신해 보는 하루다.


이전 06화 12시간만 지속된 엔도르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