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노라>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는 소외 계층에 속하는 주인공과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상호작용하며 특유의 결을 드러낸다. 그의 영화는 주인공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허락된 모든 희로애락을 누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 사람이라서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맥락 아래서 이렇게 반응할 거라는 신중한 추측이 주인공을 살아 숨 쉬게 한다.
<아노라>의 첫 장면은 의자에 앉은 남자 고객들 위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는 여자들의 몸을 차례로 비춘다. 카메라는 아노라(마이키 매디슨)가 일하는 곳의 분위기를 알리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는 오로지 아노라의 얼굴에 집중한다. 성 노동을 다루는 영화가 안고 가는 선정성 문제를 감수하고서라도, 아노라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스스로를 '애니'라고 소개하는 아노라는 클럽 HQ의 에이스로 고객을 노련하게 이끌고 만족시킬 줄 안다. 두 볼을 가득 메우는 그녀의 미소와 화려한 몸짓에 고객들은 짜릿한 황홀감에 정신을 내맡긴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름 떳떳한 노동의 대가로 받았을 돈을 그녀에게 기꺼이 바친다. 클럽 HQ는 양지에서 벌어 들인 돈이 음지에서 일하는 아노라에게 넘어가는 현장이다.
주로 나이 많은 남자들이 찾는 클럽에 젊고 돈 많은 러시아인 이반 자카로프(마크 아이델슈테인)가 찾아온다. 아노라는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밥도 먹다 말고 이반에게 이끌려 온다. 아노라의 미모와 서비스에 만족한 그는 클럽 밖에서 따로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그녀도 싫지 않은지 흔쾌히 번호를 알려준다. 아노라는 이반네 맨션에 초대받아 여러 차례 만남을 이어간다.
아노라는 이반이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자연스럽게 동석하기 시작한다. 친구들은 둘이 술집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반 앞에서는 별말을 하지 않는다. 이반은 그저 아노라와 함께 노는 게 너무 좋다. 그래서 15,000 달러를 지불할 테니 일주일 간 여자친구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한다. 끊임없이 재미있는 일을 갈구하는 그는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 스위트룸을 잡고 친구들을 초대한다.
사실 이반은 러시아 올리가르히 부모를 두고 있다. 카지노 스위트룸도 부모의 돈으로 빌렸을 테지만, 부모로부터 간절히 벗어나고 싶다. 철없는 21세 머리로 떠올린 방안은 미국인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 영주권을 얻는 것이다. 마침 스위트룸 침대에 돈이 없어도 함께라면 재미있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아노라가 누워 있다. 이반은 아노라에게 청혼하고 4캐럿, 아니 5캐럿 다이아몬드를 약속한다. 둘은 라스베이거스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판타지는 여기까지였다. 이반이 창녀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러시아까지 퍼진다. 이반의 부모님을 위해 일하는 토로스(카렌 카라굴리안), 가닉(바체 토브마시얀), 이고르(유리 보리소프)가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나선다. 아들이 가문의 명예를 먹칠했다는 소식에 이반의 부모가 직접 미국에 날아 온다. 이반은 아노라를 두고 도망치고, 드센 인상의 남자 셋과 아노라는 처절한 악다구니 끝에 함께 이반을 찾아 나선다.
토로스 일행이 맨션에 들이닥친 후로 아노라는 계속 소외된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아노라에 질문에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이반은 현실 도피를 위해 아노라가 필요했는데, 더 이상 도피할 수 없게 되자마자 그녀를 두고 사라진다. 토로스와 가닉은 이반을 찾아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서는 아노라가 꼭 필요해서 그녀를 차에 태우고 다닌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어로 아노라에 대한 반감을 거침없이 표출한다.
말 못할 사정이 있기는 그들도 마찬가지다. 토로스는 소중한 아이의 세례식을 내팽겨치고 나왔다. 이반의 뒤치다꺼리를 위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놓친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도 그 정도 희생을 하지 않는다면 억울해서 미쳐버릴 지경이다. 토로스와 가닉은 아르메니아에서 미국까지 와서 자카로프 가의 일을 봐주고 있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카로프 가가 시키는 일을 잘 해내야 한다.
정작 이 야단법석을 만든 장본인은 이반이다. 이반은 큰돈을 쓰는 것 말고는 곁에 사람을 두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 대가를 주변 사람들이 치른다. 영화는 이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피로감을 숨기지 않는다. 토로스와 가닉은 다 때려치우고 아르메니아에 돌아가고 싶다. 청소 노동자 클라라는 늘 지쳐 있는 얼굴이다. 카지노 매니저(찰스 장)는 이반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짧은 순간 경멸에 찬 본얼굴을 드러낸다.
이반의 화려한 맨션에 처음 방문한 날 아노라는 이반에게 무슨 일을 하길래 이런 집에 사느냐고 묻는다. 아노라는 세상의 좋은 건 열심히 일해야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왔을 터이다. 그런데 이반은 자기 부모님이 올리가르히이고 자기도 구글에 검색하면 나온다고 보여 준다. 성실한 노동 없이도 좋은 걸 누릴 수 있다는 발견은 아노라가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했다. 이반도 그렇게 사는데 아노라라고 해서 결혼으로 이 모든 걸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제부터 아노라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이반의 아내라는 지위를 붙드는 일이다. 아노라는 결혼을 무효화하겠다는 토로스에게 욕을 퍼붓고, 가닉의 코를 부러뜨리고, 이고르의 목덜미를 물어 뜯는다. 이반에게는 남자답게 일어나서 부모를 설득하자고 간청한다. 이반네 부모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기려고 아양을 떤다. 그 순간 토로스와 가닉은 민망함에 눈을 돌리고, 이반네 부모는 아노라에게 경멸을 감추지 않는다. 아노라는 애를 쓰지만 다 헛수고로 돌아간다.
"이용할 수 있는 어떤 용도가 있기 때문에 존중받는다는 건 그 대상에 대한 공격이다."(『정상이라는 환상』) 아노라가 제공하는 최상의 서비스란 자신의 몸에다가 성욕을 푸는 남자들에게 조금도 상처받지 않았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 것이다. 그들은 돈만 주면 이런 식의 공격을 해도 괜찮다고 믿는다. 심지어 고객이 아닌 사람들도 은연중에 또는 대놓고 그녀를 업신여긴다. 반면 결혼 무효화 과정에서 유일하게 아노라를 존중하는 시선이 있다. 이고르다.
마침내 결혼이 무효화되고 나서 이고르는 아노라가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 누구도 아노라에게 사과하지 않는다. 다들 유별난 아노라가 신데렐라 환상을 품어서 이반네 가족이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고르만이 아노라의 편에서 인간적인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는 아노라의 상황에서는 누구나 이반과 결혼해서 현실을 바꾸고 싶어 할 수 있다고 수긍한다. 그녀의 환상에 바람을 잔뜩 넣은 건 분명 이반이었다.
이상하게도 아노라는 현실 도피에 자신을 이용하는 이반을 왕자님으로 보았지만, 모욕과 폭력을 감내하면서도 자신의 곁을 지키는 이고르는 잠재적인 강간범으로 보인다. 난장이 끝나고 이고르와 단 둘이 맨션에 머무는 밤, 아노라는 이고르가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강간했을 거라고 몰아붙인다. 그런데 완력을 쓰기는 했어도 이고르 덕분에 아노라는 악다구니를 부리는 중에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그가 챙겨 둔 스카프 덕분에 추위를 견딜 수 있었다.
그럴싸한 존중으로 포장된 공격을 오래도록 받아온 사람은 존중과 공격을 구분하는 감각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현실에 적응하곤 한다. 아노라는 보호와 공격을 구분하지 못한다. 아닌 척했지만 사실 사람들이 스트립 댄서를 어떻게 여기는지도 너무나 잘 안다. 잘 알다 못해 그 시선을 체화해 자신의 몸에 손대는 사람은 욕구를 채우려는 사람들밖에 없다고 믿는 듯하다. 돈을 내면 고객이고 돈을 내지 않으면 강간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아노라>는 사실 무능을 고백하는 영화다. 이고르는 아노라가 처한 상황으로부터 그녀를 구할 수 없다. 자신의 무능을 매 순간 인지하면서 아노라가 결혼을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다. 션 베이커 감독은 성 노동이 직업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성 노동이 남기는 상처가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노라가 누적된 상처로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리고 아노라에게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아노라의 집 앞에 멈춘 자동차 안에서 이고르는 빼돌린 결혼 반지를 아노라에게 준다. 그게 이고르가 아노라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그에게 반감을 내내 드러냈던 아노라는 이고르를 한참 바라본다. 그리고 이고르의 몸 위에 올라타 그녀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서비스를 주려고 한다. 그녀의 관성은 감사를 달리 표현할 줄 모른다. 하지만 이고르의 무심한 듯 다정한 애정 표현에 관성은 길을 잃고 아노라는 무너져 내린다.
이 모든 난장을 겪은 이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했을 통곡의 시간 동안 카메라는 아노라의 얼굴에 집중한다. 이고르 그리고 카메라는 그저 고통의 목격자가 된다. 우리는 사람이든 상황이든 어떠하다고 규정 짓는 데 너무나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판단이 유보된 인물 묘사는 보는 이의 선입견을 마주하게 만든다. 저 사람은 어떠하다는 규정이 머리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규정을 하는 주체가 자신임을 모른 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섣부른 판단을 잠시 거두어들일 수만 있다면 화면을 통해 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그때 온몸으로 토해내는 통곡이 그녀만의 고통이 아닌 우리의 고통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가장 처절하게 무너져내리는 순간에 굳건히 안아주는 시선이 있다는 사실에 함께 위로받는다.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연결될 수 있고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굳건한 믿음에서 션 베이커 감독 영화의 고유한 질감이 나온다.
지상층에 머무르던 아노라가 이반의 손에 이끌려 고층 빌딩 옥상까지 갔다가 갑자기 지상층으로 떠밀려 돌아왔다. 익숙한 곳이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곳이기도 하다. 아노라가 이 간극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고르가 나타나기 전에도 클럽을 떠나는 아노라를 향해 눈물 짓던 관리직 여성이 있었다. 아노라 당신은 높은 곳에 매달리려 애쓰기 전에도 그토록 사랑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