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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에 무너지는 누군가의 천국

영화 <파 프롬 헤븐>

by 다정

더글라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은 보수적인 작은 마을에서 정원사와 사랑에 빠진 과부가 사회의 편견에 휩쓸려 좌절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은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의 인물 관계도를 빌려와 동성애자, 흑인 그리고 여성의 소수자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를 전한다.


붉은 단풍이 흐드러진 1957년 가을날 캐시 휘태커(줄리안 무어)가 지탱해 오던 일상이 무너져 내린다. 부부 관계가 오래도록 소원했는데, 남편 프랭크 휘태커(데니스 퀘이드)가 동성애자임을 밝히면서 결혼 생활이 더욱 위태로워진다. 줄곧 욕망이 좌절된 채로 지내는 캐시에게 정원서 레이몬드 디건(데니스 헤이스버트)이 나타난다. 그들은 건전한 우정을 나눌 뿐이지만, 흑인에 대한 편견이 뿌리 깊은 동네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순식간에 입방아에 오른다. 이미 사회적 평판이 무너져가던 프랭크는 캐시가 흑인과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 때문에 체면이 망가진다고 분노를 쏟아낸다.


한편 캐시는 레이몬드와 정신적 유대를 키워가며 붉은색으로부터 연보라색으로 이동한다. 캐시는 남편 프랭크를 향한 기대가 부풀어 오를 때면 새빨간 옷을 입고 있었지만, 남편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한 적이 없다. 대신 연보라색 스카프로 이어진 레이몬드와의 관계에서 캐시는 훨씬 큰 안정감과 만족을 얻는다. 연보라색은 사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던 두 사람 사이의 연정을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캐시의 욕망과 연정 모두 충족되지 못한다. 레이몬드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캐시는 붉은색 코트를 입고 연보라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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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프롬 헤븐>은 여러모로 토드 헤인즈 감독의 2016년 작 <캐롤>과 연결된다. 두 이야기 모두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사회적 소수자가 편견에 부딪히며 겪는 일들을 담고 있다. <캐롤>은 여성 동성애자와 나머지 사람들로 나뉘는 반면, <파 프롬 헤븐>은 사회가 강압적으로 규정한 정상성으로부터 다양한 정체성들이 추방당하는 이야기를 복합적으로 다룬다.


캐시는 남편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 프랭크가 '동성애 치료'를 받도록 한다. 프랭크 역시 치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캐시를 따라 의사를 만나지만 타고난 성적 지향성은 굽혀지지 않는다. 프랭크는 남편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의무는 저버린 채 뒤늦게 정체성을 찾는 데 급급하다. 그는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두렵지만, 흑인에 대한 혐오를 거두지 않는다. 백인들의 사회에서도 꿋꿋이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레이몬드는 결국 시선을 견디지 못해 캐시를 두고 떠난다.


캐시, 프랭크, 레이몬드는 저마다 타고난 정체성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거부당하고 선택지를 제한당하는 사람들이다. 만일 사회적 제약이 없었더라도 그들이 같은 선택을 내렸을까? 이혼한 여성도 고립되지 않을 수 있다면, 성적 지향성으로 박해받지 않는다면, 피부색이 한 사람의 인격과 능력을 규정짓지 않는다면. 살아있는 인간에 앞서는 도덕과 교양이 있다고 믿는 집단적 선입견에 이 모든 만약의 말들은 질식되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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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편견 말고도 서로 다른 정체성의 소수자들이 주고받는 편견들이 겹친다. 특히 프랭크는 뒤늦게 정체성 혼란을 겪는 까닭인지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에 매몰되어 여성과 흑인에 대한 존중을 잊은 듯하다. 다름 아닌 캐시도 레이몬드를 처음 만났을 때 피부색 때문에 극도로 경계했다.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과 저런 편견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 누군가는 편견을 넘어서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그러지 못할 뿐이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백인이고 남성이며 동성애자다. <파 프롬 헤븐>은 감독과 같은 동성애자 백인 남성을 변두리에 두고 이성애자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을 전면에 세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자신의 소수자성을 통해 역사 속 또 다른 소수자의 이야기를 사려 깊은 시선으로 다룬다. 비록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의 편견에 가로막혀 천국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있지만, 그의 영화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천국을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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