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플래쉬>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재즈 드럼의 전설로 남고 싶은 앤드류 네이먼(마일즈 텔러)과 그를 사정없이 몰아세우는 셰이퍼 음악학교 교수 테렌스 플레쳐(J.K. 시몬스). <위플래쉬>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격렬한 재즈 선율로 관객을 압도해 버린다.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고통을 빚어 만들어진 결과다. 아름다운 선율 뒤에는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저지르는 폭력과 최고가 되려는 욕심 때문에 자신을 폭력에 기꺼이 노출시키는 자학의 굴레가 선명하다.
플레쳐는 인격장애 진단을 하나 이상 받고도 남을 인물이다. 그를 연기한 J.K. 시몬스 배우는 경계선 인격장애를 언급했고, 강박적 인격장애나 자기애성 인격장애도 고려해 봄 직하다. 정확한 진단명이 무엇이든 플레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능수능란하게 상대를 조종하고 착취하는 인물이다. 매사에 자기가 법이다. 그걸 단번에 알아채고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머저리다.
앤드류와 플레쳐의 첫 만남부터 이런 면이 드러난다. 혼자 드럼을 치고 있는 앤드류에게 플레쳐가 말을 건다. 연주를 멈추라고 한 적 없다는 말에 앤드류는 황급히 연주를 재개한다. 그랬더니 연주를 멈춘 이유를 물었는데 왜 연주를 하느냐고 따진다. 앤드류가 이유를 순순히 말했으면 그냥 넘어갔을까? 오히려 나불거리지 말고 당장 연주를 시작하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즉 플레쳐는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순간순간 트집을 잡을 뿐, 일관성이 없다.
플레쳐는 자기가 휘두르는 폭력을 인지하고 있다. 그는 6년 전에 셰이퍼 음악학교에 입학했던 옛 제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며 스튜디오 밴드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 사실 그 학생은 플레쳐 교수의 학대로 불안과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플레쳐는 앞서 전화로 학생이 죽은 진짜 이유를 전달받았으면서, 밴드 학생들에게 거짓말한 것이다. 결국 플레쳐는 학생의 죽음과 앤드류의 증언으로 학교에서 퇴출된다.
이후 앤드류와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는 고의로 학생들에게 정서적 폭력을 가했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인정한다. 그건 모두 학생들을 찰리 파커와 같은 위대한 연주자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자기는 죽도록 노력했으며 자기 행동에 대해 사과할 마음은 전혀 없다고 못 박는다. 이후에 카네기 홀 공연에 앤드류를 불러서 망신을 주려 하는 것이 과연 훌륭한 연주자를 만드는 길일까? 찰리 파커 이야기는 플레쳐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한편 앤드류도 플레쳐가 휘두르는 폭력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플레쳐는 달콤한 말로 앤드류를 방심하게 만들고는 그에게 모욕과 폭언을 퍼붓기를 반복한다. 위대한 연주자가 되고자 하는 앤드류에게 플레쳐의 칭찬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그의 폭언은 앤드류의 영혼을 죽인다. 그런데 앤드류는 영혼이 박살 나도 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피범벅이 될 때까지 드럼 스틱을 휘두른다. 플레쳐의 칭찬에 고양되는 순간이 주는 쾌감이 마치 마약처럼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자학의 굴레 안에서 앤드류는 오직 집착과 광기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만다. 모든 게 무너져내리는 순간 그는 플레쳐에게 살의를 드러낸다. 자신을 그렇게까지 망가뜨린 장본인이 플레쳐임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플레쳐 교수의 가혹 행위에 대해 진술해 달라는 요청을 끝내 수락한다. 자신이 겪은 일을 말로 표현하면서 다시금 폭력과 착취로 점철된 관계라는 걸 확인했을 것이다.
그 끔찍한 일을 겪고도 앤드류는 카네기 홀 공연에 서 달라는 플레쳐의 요청에 응한다. 드럼을 관둔 후 앤드류의 일상은 피 흘릴 일 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1의 기쁨과 1의 지루함으로 이루어진 일상이다. 그러나 그는 1000의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연주로 얻어낸 100의 기쁨이 간절하다. 드럼을 관뒀을지언정 최고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래도 두 번은 안 당한다. 카네기 홀에서 앤드류는 무대를 지휘하는 드럼 연주자로 탈바꿈한다. 플레쳐는 미친 듯이 화를 내지만 그의 패배가 분명하다. 플레쳐는 자신이 망신당하지 않는 길로 재빠르게 선회한다. 마치 미래의 찰리 파커에게 재능을 펼칠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처럼 행동한다. 앤드류의 연주를 이용해 다시금 자기의 위대한 노력이 옳았음을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앤드류는 플레쳐 덕분에 탁월하게 성장한 게 아니라, 플레쳐의 폭력을 겪고도 무너지지 않고 자기 힘으로 날아올랐다.
영화 마지막에 앤드류와 플레쳐 사이에 만족스러운 시선이 오간다. 앤드류의 비상이 플레쳐 덕분이라고 생각해서 미소를 지은 걸까? 데미언 셔젤 감독은 인터뷰에서 과거에 만났던 음악 선생을 어느 정도 반영해서 플레쳐 교수를 만들었고, 자신 역시 예술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뒤따른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플레쳐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영화는 선홍색 피를 숨기지 않음으로써 플레쳐가 앤드루에게 가하는 폭력의 존재를 분명히 한다. 플레쳐는 앤드류를 독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최고가 되고 싶은 앤드류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플레쳐의 가치관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다. 그는 플레쳐의 부정적인 자극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독을 품고서 날아올랐다. 그가 훗날 제자를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또 다른 플레쳐가 될지도 모른다.
뛰어난 예술은 인간성 한 줌을 내버려야만 달성할 수 있을까? 영화는 재즈 연주자들의 체액을 숨김없이 보여 준다. 관악기에서 흥건하게 쏟아지는 침, 더블스윙을 치는 동안 몸에서 쥐어 짜내는 땀, 그리고 드럼 스틱에 피부가 닳아 손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피. 훌륭한 재즈 연주에는 낭만이 아니라 질척거리는 액체가 흐른다. 가까이에서 보면 낭만과 거리가 먼 재즈에 왜 그토록 매진하는 걸까?
앤드류는 찰리 파커를 동경한다. 하지만 음악을 모르는 가족들에게 찰리 파커는 약물 중독으로 단명한 사람이다. 찰리 파커는 삶을 바쳐 연주했을 테지만, 그 진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연주가 아닌 다른 것으로 기억된다. 심지어 대다수 연주자들은 어떤 식으로도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최고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이 기억하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상을 향해 자기 삶을 바치는 예술가에게 인간성은 사치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앤드류와 같은 예술가들은 폭력과 자학에 굴레 안에 있는 줄 알면서도 거기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가 보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몇 번이고 초월하면서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다. 예술이 지향하는 초월성은 예술에 몸담지 않은 사람에게 뜬구름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 삶을 바쳐 고통스럽게 남긴 음악을 편하게 듣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