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꿈을 좇는 이들의 초상

영화 <라라랜드>

by 다정

꽉 막힌 고속도로를 자유로이 누비는 군무 오프닝만으로 관객의 마음을 빼앗기 충분했다. <라라랜드>는 화려한 원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고속도로 위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는 모습을 롱테이크로 보여 주며 시작한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줄 알지만 영화라서 가능한 마법에 마음을 열게 된다. 찬란함, 황홀감의 옷을 입은 <라라랜드>는 이런 마법을 현실에 구현해 내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정체된 도로 위에서 미아(엠마 스톤)는 오디션을 위해 대사를 연습 중이고,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은 재즈 음악의 한 구절을 반복해서 익히고 있었다. 배우의 꿈을 품고 L.A.에 온 미아는 한껏 들떠서 오디션을 보고 어이없이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이번 오디션도 굴욕적으로 떨어진다. 영화에서 짧게 지나가는 순간이지만 미아에게는 지난 몇 년 동안 이어진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아는 여전히 꿈을 꾼다.


한편, 순수 재즈에 인생을 바칠 작정인 세바스찬은 한 레스토랑에서 모멸스러운 해고를 당한다. 해고 사유는 피아노 연주자로서 정해진 캐럴 리스트를 따르지 않아서다. 그의 꿈은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연주하는 재즈 클럽을 운영하는 것이다. 스스로 고용주가 되고 싶기에 다른 사람의 명령에 따르는 게 죽기보다 싫다. 그러나 아는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당장 생계가 어려운 그는 어쩔 수 없이 원치 않는 연주를 하러 다닌다. 재즈 클럽의 꿈을 품은 채.



꿈을 품은 두 캐릭터가 만나 열정의 시너지를 일으킨다. 재즈가 싫다던 미아는 재즈바에서 세바스찬의 연주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게 되었다. 세바스찬과 대화를 하면서 미아는 어린 시절 각본을 직접 써서 연기했던 경험을 다시 떠올린다. 미아는 세바스찬을 만나면서 각본을 쓰기 시작하고, 세바스찬 앞에서 자신이 만든 1인극을 처음 상연한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의 꿈과 열정에 이끌렸다. 그러나 관계가 오랜 시간 지속되고 먼 미래를 그려나가야 한다는 현실적인 압박이 찾아온다. 결국 세바스찬은 미아가 남들 앞에서도 떳떳하게 여길 수 있는 동반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꿈을 잠시 내려놓기로 결정한다.


세바스찬은 재즈를 다시 살릴 수 없다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미아에게는 꿈에 집중할 수 있게 사랑과 열정을 한껏 불어넣었으면서 말이다. 어차피 자신의 꿈은 이룰 수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고 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는 미아가 강요한 적 없는데도 미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키이스(존 레전드)의 밴드에 들어간다. 경제적으로 더없이 성공하지만, 미아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열정 가득한 재즈광은 빛을 잃는다.


미아는 순수 재즈를 지키겠다는 세바스찬의 열정에 감화되었다는 걸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존재의 가장 중심부의 무언가를 내려놓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심지어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고도 말이다. 결국 미아의 1인극을 눈여겨본 캐스팅디렉터의 제의로 미아는 파리에 가게 되고, 세바스찬은 미아를 따라가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말하며 이별한다.



세바스찬이라는 캐릭터를 지탱하는 것은 그의 꿈이다. 시간이 흐르고 성공한 배우가 된 미아는 세바스찬이 운영하는 재즈 클럽에 우연히 들어간다. 세바스찬이 연주하는 동안 재생되는 판타지 속에서 세바스찬은 미아를 따라 파리에 갔고 함께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재즈를 포기한 세바스찬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인생에 꿈을 대신할 무언가가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적어도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그 세바스찬과는 많이 다른 사람일 것이다.


애초에 미아와 세바스찬 모두 꿈이 개성의 전부라고 할 만큼 다른 디테일은 거의 부각되지 않는 캐릭터다. 어떤 꿈을 품고 있는가에만 전적으로 기댄 캐릭터 구상은 의도된 몰개성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낙오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고 다시 용기를 내는, 꿈 꾸는 자들의 추상적인 상징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번째 음악 'Another Day of Sun'의 가사를 살펴보자. 스크린 속에 들어가기 위해 풋풋한 첫사랑을 떠나온 여자, 모든 기회의 문을 두드리고 다니는 남자, 계속된 실패와 경제적 어려움에도 먼지 쌓인 마이크와 조명만 있으면 된다는 여자. <라라랜드>는 처음부터 두 사람의 사랑이 아닌 꿈의 결실을 향해 달려가겠다고 선언했다. 화려한 음악과 군무를 대낮에 고속도로 위에서 구현해 낸 배우들과 제작자들부터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바친 사람들일 테다.


<라라랜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반복하려야 반복할 수 없는 아름다운 찰나의 연속이다. 무수한 꿈들이 모여 피워낸 작은 기적들로 가득하다. 미아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세바스찬이 키이스의 밴드에 계속 머물렀다면. 현실 속 수많은 미아와 세바스찬이 도중에 멈춰 꿈을 포기했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라라랜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거나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라라랜드>는 꿈을 좇는 이들의 손에서 탄생한 그들 자신의 초상이다.



keyword
이전 09화예술적 경지를 향한 폭력과 자학의 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