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2020년 한 카페에서 두 남녀가 똑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어폰을 한쪽씩만 끼우고 음악을 들으면 서로 전혀 다른 음악을 듣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는 모습들을 보면 이보다 더 잘 통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테이블에서 각자의 연인을 앞에 두고 있다. 마침내 두 사람이 이어폰 하나로 음악을 나눠 듣는 연인들에게 한 마디 하려고 일어난다. 바로 그때 서로 눈이 마주치고, 이렇게 새로운 로맨스가 시작되는 듯하다. 그러나 둘은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로부터 5년 전, 지하철역 앞에서 막차를 놓친 21살의 하치야 키누(아리무라 카스미)와 야마네 무기(스다 마사키)가 우연히 만나 함께 밤을 새운다. 똑같은 하얀색 스니커즈를 신고, 똑같은 영화 상식을 갖추고, 똑같은 소설가들의 작품을 섭렵하는 그들은 마치 하늘이 정해준 인연 같다. 밥을 세 번 먹고 고백하지 않으면 평생 연인이 될 수 없다는 세간의 말에 따라, 그들은 세 번째 만남에 연인이 된다.
두 사람은 함께하는 순간이 주는 환희에 흠뻑 젖어든다.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지나간 환희를 몇 번이고 곱씹는다. 이내 동거를 시작하고 상대방 이외의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서로에게 몸과 마음을 맞댄 채 시간이 흐른다. 키누는 취업의 문턱을 넘지 못해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며, 무기는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지만 일감을 주는 출판사가 하루아침에 단가를 후려친다. 거기에 무기네 아버지는 가업을 잇지 않겠다는 무기에게 생활비 지원을 끊는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는 코끼리가 두둥실 떠오른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키누와 무기의 머릿속에도 그런 코끼리가 자리 잡고 있다. 키누가 챙겨 보던 연애 블로거는 ‘시작이란 건 끝의 시작’이더라도 자신의 사랑은 지켜내겠다고 말했는데, 갑자기 자살 소식이 전해진다. 큰 충격을 받은 키누는 애써 마음을 잡고 자신의 사랑은 좋은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키누네 부모님이 갑자기 두 사람의 집에 찾아온 날, 무기는 키누가 주의를 줬음에도 “인생은 곧 책임”이라는 키누네 어머니의 말이 뇌리에 박힌다.
무기는 경제적 현실에 책임을 지기 위해 꿈을 잠시 접어 두고, 중소 통신 판매 회사에 들어간다. 그는 취직을 했으니 키누와 지금 모습 그대로 오래오래 함께하는 미래가 보장된다고 착각했다. 앞으로 인생의 목표는 “키누와의 현상 유지”라고 말하고, 키누도 거기에 만족스러운 듯하다. 그러나 직장에 몸담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키누와 자신을 강하게 연결해 준 독특한 감수성이 빛을 잃어 간다. 현상을 유지하겠다던 무기 자신이 누구보다도 크게 변한다.
달콤한 사탕을 입에 물고만 있으면 영원히 입 안에 있을 거라 믿고 있는 사이, 사탕은 녹아 사라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모두 시간 속에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변화를 막을 길이 없다. 지금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지나가는 시간이 일으키는 변화를 상쇄하는 적극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면서 지금 모습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는 동안 키누와 무기는 서서히 멀어진다.
둘은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에 연애를 시작했던 식당에서 4년 연애를 끝마치는 대화를 나눈다. 미련을 숨기지 못하는 무기는 마지막으로 결혼하자고 청하고 키누도 잠시 흔들린다. 그때 가까운 자리에 이제 막 서로에게 애정을 키워 가는 어린 커플이 앉는다. 똑같은 신발을 신고 똑같은 뮤지션의 음악을 듣는 그들은, 마치 21살의 키누와 무기를 다시 보는 듯하다. 그제야 두 사람은 자신들이 무엇을 놓쳤고 그 결과로 어떤 현실을 맞이하게 된 것인지 뼈아프게 받아들이며 눈물을 쏟는다.
이별을 받아들이고 난 뒤에 키누와 무기는 연인 관계에 묶여 있을 때보다 서로를 훨씬 편안하게 대한다. 키누가 집을 못 구해서 3개월이나 더 같이 살았는데, 그 모습은 영락없이 사이좋은 연인이다. 그들은 헤어지고 나서야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라는 프레임에 가려져 있던 그대로의 서로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세 번째 만남에 고백하지 않으면 흐지부지된다는 세간의 말로 시작된 관계는 주어진 프레임에서 벗어나 내 눈앞에 존재하는 상대와 함께 있는 법을 배우며 끝이 난다.
다시 2020년, 카페에서 나온 키누네 커플과 무기네 커플은 각자의 길을 간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등을 보인 채 뒤도 안 돌아보고 손을 들어 흔든다. 과거의 설렘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의 산뜻한 손짓이다. 시든 꽃다발은 쓰레기통으로 보낼 줄 알게 된 그들은 이제 새로운 꽃을, 기왕이면 비옥한 땅에 뿌리를 단단히 내린 꽃을 피워 보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