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사랑이다

영화 <아이 엠 러브>

by 다정

<아이 엠 러브>는 엠마(틸다 스윈튼)가 큰아들의 친구 안토니오(에도아도 가브리엘리니)에게 빠져들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내달리는 과정을 지켜본다. 그녀는 이탈리아 레키 가문의 첫째 며느리로 삼 남매를 키우고 집안의 내조를 담당하는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다. 'I love'(나는 사랑한다)가 아닌 'I am love'(나는 사랑이다)라는 명제를 체화하고 있는 엠마에게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은 곧 자신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남편 탄크레디(피포 델보노)는 러시아에 미술품을 수집하러 종종 들리다가 알고 지내던 복원가의 딸을 이탈리아에 데려왔다. 탄크레디는 그녀에게 '엠마'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줬다. 마치 탄크레디의 수집품처럼 이탈리아로 건너온 엠마는 레키 가문이 며느리에게 기대하는 바대로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고 내조에 매진한다.



엠마는 결혼 후에 러시아에 돌아간 적이 없다. 오래 전 러시아인의 정체성을 포기했고, 이제 이탈리아인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다. 러시아어 이름조차 잊은 엠마는 어린 시절 가족들에게 '키티쉬'라고 불렸던 기억만 어렴풋하다. 러시아어 이름의 애칭은 대개 'a' 또는 'ya'로 끝나기 때문에 '키티쉬'도 부정확한 기억일 것이다. 그녀에게 러시아에 관한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엠마는 큰아들 에도(플라비오 파렌티)와 있을 때만 러시아어로 대화한다. 에도는 세 남매 중 유일하게 어머니의 모국어를 익혔다. 그리고 에도만 엠마가 만든 러시아의 생선 수프 '우하'를 좋아한다. 이탈리아에 처음 왔을 때 엠마는 어려서 배웠던 러시아 요리를 하면서 외로움을 견뎠다. 희미해진 러시아인 정체성의 끈을 아직까지 잡고 있게 해 준 에도가 고맙고 애틋할 것이다.


그런데 엠마는 에도의 친구 안토니오에게 격렬하게 이끌린다. 안토니오를 처음 만나는 순간 엠마에게 닥칠 거대한 운명을 암시하듯 극단적인 하이앵클이 그녀의 머리 위에 내리 꽂힌다. 이때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로 지나가지만, 에도의 추천으로 안토니오가 일하는 식당에 방문한 엠마는 그의 요리에 매료된다.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새우의 탱글한 식감을 황홀하게 음미한다. 연극적인 핀 조명이 엠마와 음식 위에 떨어지고 나머지는 모두 암흑이다.


안토니오도 엠마에게 마음이 있어서인지 최선을 다해 요리를 준비했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정성이 들어간 요리를 알아본다. 엠마는 음식을 먹으며 안토니오의 진심을 온몸으로 느끼고 더 깊이 사랑에 빠진다. 당장 안토니오와 몸을 포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기다리고 있기에 산레모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 알아내고 자리를 뜬다.



엠마는 시어머니와 함께 기차역에 막내딸 베타(알바 로르바케르)를 마중 나간다. 긴 머리를 싹둑 자르고 돌아온 베타는 엠마에게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사랑하는 연인의 사진을 보여 준다. 베타는 에도와 엠마에게만 정체성을 밝히고 집안을 벗어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꾸리고 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엠마는 진심으로 베타의 삶을 응원한다.


엠마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감히 누려보지 못했다. 딸의 행보에 엠마는 그동안 당연하게 포기했던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산레모에 간다. 안토니오를 만날지도 모르는 곳으로.


산레모 거리를 걷던 엠마는 어린 시절 러시아에서 봤을 법한 모스크를 넋 놓고 바라본다. 그러다 우연히 안토니오를 발견하고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뒤쫓는다. 짧지 않은 추격 끝에 두 사람은 다시 만난다. 안토니오는 그가 레스토랑을 열기 위해 준비 중인 공간으로 엠마를 초청한다. 자연 속에서 안토니오는 더욱 빛난다. 짧지만 강렬한 만남 후에 집에 돌아온 엠마는 다급하게 화장실을 향하고 참았던 소변을 보며 본능적인 환희에 젖는다.



안토니오는 레키 집안의 가족 행사 요리를 맡는다. 행사의 음식 메뉴를 정한다는 핑계로 엠마와 안토니오는 다시 만난다. 그동안 한껏 꾸미고 다닌 엠마가 처음으로 굽 없는 샌들에 바지 차림이다. 식당에서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결국 안토니오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곳은 커튼으로 빛을 가리고 문을 꼭꼭 닫는 레키 가문의 대저택과 달리 탁 트이고 햇빛이 가득 번진다. 남편 탄크레디는 엠마에게 수갑 채우듯 팔찌를 채웠던 반면, 안토니오는 가장 편안한 옷과 신발마저도 벗겨준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카메라는 창문 밖 자연을 보여 준다.


흥분이 가라앉은 뒤 엠마는 안토니오에게 지난 삶을 이야기하면서 '우하'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다. 에도만 좋아하던 음식을 이제 안토니오에게도 공유한다.


그런데 바로 우하 때문에 에도가 엠마의 외도를 눈치챈다. 가족 행사 때 주방을 지휘하는 안토니오는 우하를 새로 해석한 요리를 내놓는다. 에도는 식탁 위에 놓인 우하를 보고 엠마를 향해 원망과 증오를 쏟아낸다. 엠마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에도를 급히 따라가는데, 불 같이 화를 내던 에도는 발을 헛디뎌 머리에 치명상을 입고 죽는다.


엠마는 죄책감에 휩싸인다. 침대에 겨우 몸을 눕히고 눈을 감자마자 고용인 이다(마리아 파이아토)가 와서 커튼을 닫다. 엠마는 다시 한번 저택의 그림자에 갇힌다. 잠시 후 생명력이 모두 빠져나간 듯한 모습으로 이다가 입혀 주는 대로 검은 옷을 갖추고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레키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리를 지키려 했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그녀는 홀연 사라진다.


거대한 건물에 들어선 엠마는 구두를 내팽개치고 맨발로 우두커니 선다. 따라 들어온 탄크레디는 엠마를 구두가 있는 곳으로 끌고 와서 억지로 구두를 신긴다. 엠마는 안토니오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아주 잠시 생각하던 탄크레디는 엠마의 어깨에 걸쳐주었던 재킷을 도로 챙기고 '넌 존재하지도 않았어'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난다. 아름다운 수집품으로서 쓸모가 다했다면 원래 없었던 셈으로 치겠다는 듯하다.



레키 집안에서 유일하게 러시아어로 소통하던 아들 에도는 이제 없다. 역설적이게도 에도의 죽음으로 인해 엠마가 감옥과 다름없는 집안에 메여 있을 이유도 사라진다. 누구의 책임인지를 떠나, 에도는 죽었고 엠마는 살아 있다.


억압된 삶에서 놓여난 사람은 다시 억압 아래로 돌아갈 수 없다. 엠마는 사랑을 맛보았고 욕망을 따라가 쾌감을 경험했다. 'I am love'(나는 사랑이다)라는 정체성을 자각한 이상 살아있는 동안 욕망을 실현하며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더 이상 레키 가문이 요구하는 역할 수행에 욕망을 희생시킬 수 없다.


나머지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있는 틈을 타 엠마는 황급히 돌아와 검은 원피스와 구두, 장신구를 던져버리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가족들 앞에 선다. 엠마마저 떠나면 베타는 정체성을 터놓을 수 있는 가족 구성원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베타는 진심으로 응원하는 눈빛이다. 아마 베타는 홀로 남겨지기보다 가족들을 떠나는 삶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엠마 덕분에 이 선택지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엠마가 거침없이 저택을 떠나고 카메라는 열린 대문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엠마와 안토니오가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인가?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엠마를 추동하는 사랑은 오로지 안토니오만을 향한 것인가? 자기 자신이 사랑 자체임을 자각한 엠마는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본연의 사랑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그녀에게 에도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강요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욕망은 과거를 곱씹기보다 지금 이 순간 충족되는 사랑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keyword
이전 05화모순을 딛고 선악을 넘어서는 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