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17년 여든을 바라보는 노장이 스튜디오 지브리 사상 최대 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7년의 제작 기간 끝에 공개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일대기와 삶의 소회를 말하고 싶었다면 자서전이 나았을 터이고, 그간 쌓아 올린 작품 세계를 돌아보고 싶었다면 다큐멘터리가 나았을 거다. 다른 형식들을 제쳐 두고 평생을 바쳐 온 업(業)인 애니메이션을 만든 데는 애니메이션으로만 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짐작하게 된다.
1943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병원의 화재 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마키 마히토(산토키 소마)는 군수 물품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마키 쇼이치(기무라 타쿠야)를 따라 도쿄를 떠나 시골로 이사 간다. 그들은 어머니의 동생이자 아버지의 새로운 아내인 나츠코(기무라 요시노)가 머무는 대저택에서 살게 된다. 나츠코는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 중이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마히토는 나츠코에게 최소한의 예의만 지킬 뿐이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왜가리가 마히토가 저택에 도착한 날부터 주변을 맴돈다.
마히토는 전학 간 학교 아이들과 다툼을 벌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돌로 자기 머리를 세게 친다. 아버지는 상처에 분개하며 학교에 항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거액 기부로 재산을 자랑하고 돌아온다. 나츠코는 마히토를 잘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이 깊어져 앓아 눕는다. 그녀는 마히토의 병문안을 희망하지만 한참 만에 나타난 마히토는 인사 몇 마디만 하고 돌아선다. 마히토는 그 방에서 훔친 담배를 저택에서 일하는 영감에게서 활과 화살 만드는 법을 배우는 데에 쓴다.
이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아낼 힌트는 역으로 실사화가 가장 어려운 요소에 있을 것이다. 아마 개봉 전 티저 포스터에 유일하게 등장했던 왜가리(스다 마사키)가 유력해 보인다. 왜가리는 새와 인간의 경계를 흐리는 생김새를 가졌다. 왜가리의 목구멍에서 우스꽝스럽고 땅딸막한 왜가리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인간의 상상력과 작화 기술을 동원해 구현한 경이로운 이미지다. 제작자 스즈키 토시오는 인터뷰에서 CG로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의 예시로 이 순간을 꼽았다.
독특한 생김새에 더해 '이해할 수 없음', '알 수 없음'의 화신(化身)처럼 보이는 왜가리를 말로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가리는 죽은 어머니에 대한 마히토의 그리움을 노골적으로 자극한다. 기이하고 기분 나쁜 목소리로 꿈 속에서 어머니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어머니는 죽지 않았다며 저택 근처의 탑으로 마히토를 유인한다. 아직은 마히토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들이는 왜가리의 의도를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전체를 놓고 보면 왜가리는 마히토를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게 밀어붙이는 힘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 규칙이나 도덕적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신화 속 트릭스터(trickster)처럼 말이다. "트릭스터가 자신의 고유하고 모호한 행동을 통해 반영하는 것"은 "종잡을 수 없고 아직 완전하게 인식되지 않은 진화하는 인간의 의식"(『살아 있는 미로』) 자체이다. 왜가리는 마히토의 무의식에 숨어 있지만 인식되어야 하는 자신의 일부를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마히토가 돌로 머리에 상처를 낸 동기는 한 마디로 정리하기 힘들다. 자해는 자기 보존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인데, 이 세상에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기 몸밖에 없다는 좌절감이 본능을 압도할 때가 있다. 마히토는 국가의 전쟁,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재혼 중 그 무엇도 자기 의지로 선택한 적 없다. 의지에 반(反)해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마히토에게 무력감이라는 상처를 남긴다. 무력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마히토는 세상은 악의로 가득 찬 곳이라고 단정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길을 택한 듯하다.
마히토는 조용한 관찰자로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려 하지만, 성가신 왜가리는 그를 움직이게 만든다. 마히토 방 창가에 나타나 어머니를 흉내 내고, 연못에서 알 수 없는 힘으로 마히토를 사로잡는다. 나츠코의 도움으로 왜가리를 쫓아내지만, 마히토는 다음 기회를 노리기 위해 왜가리 깃털로 활과 화살을 만든다. 그러던 중 죽은 어머니가 남긴 책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발견해 읽은 뒤, 마히토는 갑자기 사라진 나츠코를 찾아 활을 들고 왜가리가 유인하던 탑에 들어간다.
탑에서 마히토는 왜가리의 농간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화살을 맞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변한 왜가리 남자와 함께 이세계(異世界)에 들어선다. 마히토의 눈 앞에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묘한 세계가 펼쳐진다. 펠리컨 떼에 밀려 죽은 자의 무덤에 발을 들인 마히토는 키리코(시바사키 코우)의 도움을 받는다. 이세계에서 유일하게 살생을 할 수 있는 키리코는 거대한 생선을 잡아 죽은 자들을 먹여 살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영혼 와라와라들을 돌본다.
마히토에게 와라와라는 악의 한 점 없는 선한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와라와라들이 하늘에 떠오르자 펠리컨 떼가 몰려온다. 이때 히미(아이묭)가 나타나 불꽃을 일으켜 펠리컨 떼를 물리친다. 마히토는 펠리컨 떼이든 히미의 불꽃이든 와라와라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는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고 여기지만, 키리코는 일부가 희생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상처 입고 추락한 늙은 펠리컨 대왕(쿠니무라 준)은 숨을 거두기 직전 배고픔에 시달리는 운명에 좇겨 와라와라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때마침 다시 나타난 왜가리는 마히토가 펠리컨 대왕을 묻어주는 모습을 지켜본다. 다음 날 마히토와 왜가리는 티격태격하지만 키리코가 권유하는 대로 둘이서 함께 나츠코를 찾아 나선다. 어느 대장장이를 찾아가지만 그의 집은 비대한 식욕에 사로잡힌 앵무새들이 이미 장악했다. 왜가리는 몇몇 앵무새를 유인해 사라지고 마히토는 앵무새들의 소굴에 발을 들인다. 불꽃 속에서 나타난 히미가 앵무새에 잡아먹힐 위험에 처한 마히토를 데리고 집으로 간다. 그리고 자신의 여동생인 나츠코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기로 한다.
마히토는 히미의 도움으로 나츠코를 찾아내지만, 나츠코는 마히토가 너무 싫으니 어서 가 버리라고 소리 친다. 나츠코를 구하러 왔다고 믿었던 마히토는 당혹스럽다. 돌아보면 나츠코는 곁을 내주지 않는 마히토에게 한결같이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히토는 무력감에서 비롯한 냉담한 태도가 나츠코에게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런데 상처를 줄 수 있음은 사랑을 줄 수 있음이기도 하다. 마히토는 드디어 나츠코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나츠코도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인다.
처음 마히토는 왜가리를 좇아 이세계에 발을 들일 때는 선과 악의 대립으로 인지했을 것이다. 이유 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듯한 왜가리를 악의를 품은 적이라 여기고, 나츠코는 위험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츠코는 다름 아닌 마히토에게 큰 상처를 받아 이세계에 스스로 걸어 들어왔다. 왜가리는 키리코의 말대로 환상의 짝꿍이 되었다. 마히토는 왜가리 부리에 난 구멍을 메우는 꼭 맞는 마개를 만들어 주었고, 왜가리는 위험에 처한 마히토를 수차례 구한다.
한편 이세계과 탑의 창조자 큰할아버지(히노 쇼헤이)는 마히토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위태로운 이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히토에게 악의에 물들지 않은 돌 13개를 새로이 쌓으라고 한다. 스스로 머리에 상처를 낸 자신의 악의를 선명하게 인식한 마히토는 탑을 쌓기를 거부한다. 마히토 자신 역시 한 조각 악의를 나눠 가지고 있으며, 악의를 품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악의로 가득 차 보였을지도 모른다.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면 전처럼 적대적으로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악의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와 거리가 멀었다. 이세계에서 마히토는 와라와라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펠리컨을 만났고, 식욕만 남은 듯한 앵무새들을 만났다. 선의만 남겼다고 하는 세계는 선악을 돌아볼 이유도 없어지고 결국 앵무새의 비대해진 욕구로 뒤덮였다. 결정적으로 큰할아버지의 정원에 난입한 앵무새 왕은 단숨에 돌탑을 쌓아 올리고, 쓰러질 것 같으니 칼로 베어 버린다. 선의로만 쌓은 세계를 만드는 일은 실패로 돌아간다.
붕괴하는 이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마히토와 히미 그리고 키리코와 나츠코는 시간의 문 앞에서 만난다. 히미는 마히토 어머니의 어린 시절이다. 앞서 마히토는 히미가 준 잼 바른 빵에서 어머니의 흔적을 발견하고 천진한 행복감을 느꼈다. 화재 경보를 듣고 달려 나가던 마히토는 어머니를 구할 수 없었지만, 시간의 문 앞에서 히미가 다른 삶을 선택하도록 설득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히미가 과거로 돌아가면 불에 타 죽을 거라고 말하며 그녀를 말린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일 힘을 주는 게 사랑이 하는 일인가 보다. 히미는 마히토를 낳는 기쁨을 다시 겪을 수 있다면 화재 사고로 죽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화재 사고로 죽는 비극과 마히토를 낳는 기쁨을 선악으로 가리지 않는 태도다. 마히토는 히미가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만나고 싶어할 만큼 깊이 사랑받고 있었다. 이로써 고통은 악이고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마히토의 믿음이 무너진다. 그 깨달음은 마히토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잊고 있던 사랑의 감각을 일깨운다.
두 개의 문이 동시에 열리고 히미와 젊은 키리코는 과거로, 마히토와 나츠코는 현재로 나간다. 마히토와 나츠코는 손을 잡고 활짝 웃으며 저택 사람들 앞에 다시 나타난다. 히미를 만난 덕분에 마히토는 당연해 보이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서 가능하지 않은 줄 알았던 나츠코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모순되는 줄 알았던 두 가지 사랑을 모두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마히토는 이세계 모험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기꺼이 가능하게 만드는 사랑을 배웠다.
이로써 왜가리의 역할이 마히토를 혼돈에 빠뜨림으로써 마히토가 한 뼘 성장하게 돕는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소임을 다한 왜가리는 마히토에게 자신과 이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다 잊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영원한 유산은 구체적인 기억이 아닌 정서적인 형태로 남는 법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왜가리와의 우정, 히미의 사랑이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가더라도 그 정서적 경험은 마히토와 함께할 것이다. 마침내 동생이 태어나고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도쿄로 돌아가는 날, 마히토는 이사 왔을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방을 나선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마히토처럼 전쟁에 이바지하며 부를 쌓는 아버지를 두었다. 악의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어린 존재의 선의는 좌절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비난했지만 아버지 덕분에 일찍이 애니메이션을 배울 수 있었다. 저주나 다름 없는 삶의 모순을 온몸으로 앓으며 성장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영화를 통해서는 꾸준히 평화와 생명에 대한 경이를 말했다. 이런 삶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 답을 찾아 다음 세대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단순한 회고록이 아닌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만들기로 한 이유였다고 추측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