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
웨스 앤더슨은 강박에 가까운 대칭 스타일로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 온 감독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2014)의 미장셴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레퍼런스이다. 그런데 2023년에 개봉한 장편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웨스 앤더슨은 그동안 쌓아 올린 견고한 대칭의 성(城)을 스스로 무너뜨린다. 파격의 현장에서는 "You can't wake up if you don't fall asleep(잠들지 않으면 깨어나지 못한다)"이라는 구호가 반복된다.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크게 3개 층위의 이야기가 겹쳐 있다. (1) 관객에게 직접 현대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전달하는 TV 방송 (2)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창조한 작가, 연출가, 배우진들의 이야기 (3)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 영화가 시작하면서 (1)의 TV 방송 진행자(브라이언 크랜스턴)는 (2), (3)이 TV 방송을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이야기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5000년 전에 소행성이 떨어진 이유로 유명해진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열리는 청소년 과학 경진 대회 수상자 5명과 그들의 학부모 앞에 난데없이 외계인이 나타나면서 일어나는 1955년의 소동을 그린다. 그곳에는 아들 우드로(제이크 라이언)를 따라 온 전쟁 사진작가 오기 스틴백(제이슨 슈왈츠먼), 그리고 딸 다이나(그레이스 에드워즈)와 동행한 유명한 배우 밋지 캠벨(스칼릿 조핸슨)이 있다.
오기는 견인차에 끌려오는 자동차를 타고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입성한다. 원래 계획은 어린 세 딸을 장인어른 스탠리 잭(톰 행크스)에게 맡기고 우드로만 데리고 '애스터로이트 시티'에 오는 거였지만 말이다. 자동차 정비공(맷 딜런)은 과거 경험에 근거해서 오기의 자동차를 수리해 보지만, 시동을 걸자마자 하부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부품이 떨어져 나온다. 앞으로 펼쳐질, 전례 없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해 오기가 전혀 통제력을 갖지 못한다고 미리 말해주는 듯하다.
딸들을 스탠리에게 맡겨야 하는 건 3주 전 아내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오기는 우드로와 세 딸에게 엄마의 죽음을 아직 말하지 못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을 사진으로 남겼을 테고, 자기 자신도 뒷통수에 총알이 스쳐간 흉터를 가지고 있다.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하던 죽음이, 정작 자기 삶에 들어올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어쩌면 아내가 죽은 뒤로 오기의 삶도 주저앉고 있었는지 모른다.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장르를 단숨에 SF로 변모시키는 기이한 사건이 일어난다. 5000년 전 소행성이 떨어져서 생긴 분화구 안에 사람들이 모여 행성 궤도를 관측하는 현장에, UFO가 나타나서 외계인이 그 소행성을 들고 사라진다. 오기는 그 순간 전쟁 사진작가로서 직업 정신을 발휘해 소행성을 소중하게 들고 있는 외계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정부 당국은 과거에 정한 규정에 따라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봉쇄령을 내리고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통제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외계인이 목격한 사실을 스스로 부정할 때까지 취조를 받는다. 그러나 과학 경진 대회 수상자 리키(에단 조쉬 리)와 아이들은 힘을 합쳐서 외계인의 등장을 세상에 알린다. 결국 정보 통제는 실패로 돌아가고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외계인이 다녀간 관광지로 부상한다.
외계인의 등장은 연극 전체 스토리에서 가장 현실성이 없는 일일 것이다. 외계인을 연기하는 배우(제프 골드브럼)는 외계인이 어떤 은유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은유하는지는 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극 속 외계인 역할을 잘 수행한다.
연극 속 아이들도 외계인 다음의 삶으로 유유히 나아간다. 리키는 중범죄를 저질렀다고 일갈하는 깁슨 장군(제프리 라이트)에게 당당하게 맞선다. 엄청난 사건을 맞닥뜨리고도 정해진 과학 수업 내용을 벗어나지 못하는 교사 준(마야 호크)과 달리, 견학생 드와이트(프레스톤 모타)는 외계인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부른다. 외계인이 다시 나타나 소행성을 돌려주고 벌어진 소동 한가운데서, 우드로는 달 표면에 다이나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공표한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발이 묶인 동안 오기와 밋지는 밋지의 대사 연습이라는 핑계로 방갈로 너머 밀회를 수차례 즐긴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마침내 한 방에 있는 모습을 다이나가 목격한다. 밋지는 이 소식을 오기에게 전하면서 두 사람이 무언가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기는 갓 구운 빵을 먹으면서 문득 외계인의 '너흰 끝났다'고 하는 듯한 시선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한다. 이에 밋지는 끝났을 수도 있다고 답하고, 오기는 밋지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고 짐작한다.
3주 전 아내를 잃은 오기는 어쩌면 새로운 사랑이 될 수도 있었던 밋지와의 관계가 어긋나는 순간, 신체적 고통을 자초한다. 그는 빵을 구웠던 그릴 위에 스스로 손을 올린다. 밋지는 물론 오기 스스로도 놀란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밋지는 "It actually happened(정말로 그 일이 일어났네요)"라고 말한다.
오기를 연기하는 (2)의 존스 홀(제이슨 슈왈츠먼)은 외계인의 등장보다도 이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알고 싶다. 배역을 얻기 위해 극작가 콘래드 어프(에드워드 노튼)를 만난 자리에서는 오기가 심장이 너무 두근거리는 이유를 찾으려고 그랬을 거라는 추측을 내놓는다. 콘래드도 동의하는 말을 한다. 그 자리에서 눈이 맞은 두 사람은 진한 입맞춤을 나누었으니, 심장의 떨림 때문이라는 데에 힘이 더 실렸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오기를 연기해 보니 더더욱 알 수 없어진 듯하다. 다시 외계인이 나타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에서 존스 홀은 의미를 찾기 위해 무대를 벗어나고, 연극 속 오기는 스토리를 이탈한다. 존스 홀은 (2)의 연극 연출가 슈버트 그린(애드리언 브로디)에게 우주 어디에서라도 정답이 주어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 슈버트 그린은 연극을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으니 그저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말한다.
존스 홀이 슈버트 그린에게 연극의 의미를 묻는 동안 연극 무대에서 오기는 사라진다. 즉 오기는 잠든다. 그러다가 존스 홀이 의미를 구하기를 포기하고 무대에 돌아오는 순간 오기는 다시 깨어난다. 애초에 존스 홀은 왜 외계인의 등장보다도 오기가 스스로 화상을 입는 이유를 따져 묻는가? 그의 질문에는 연극의 의미가 밝혀지지 않으면, 즉 깨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오기는 더 이상 상실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어서 신체적 고통으로 회피하려 했을까? 아내의 죽음, 외계인의 등장, 밋지와의 이별 등등 조금도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온전히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었을까?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져 있는 불일치를 이렇게나마 교정하고 싶었을까? 이유야 무엇이든, 오기는 스스로 손을 그릴 위에 올렸다.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났다.
영화 바깥으로 시야를 넓혀서, 이 영화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고 물을 수도 있다. 이 질문에도 영화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영화를 즐길 수 없다는 믿음이 보인다. 영화는 이렇게 되묻는 듯 싶다. '과연 당신은 당신 삶의 의미를 다 알면서 살아가기에 이 영화에도 의미를 묻는 건가?'
연극 상연이 시작되고 6개월 뒤 콘래드 어프는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존스 홀은 난데없이 연인을 영영 잃는다. 오기의 아픔이 그대로 느껴지지만 오기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었던 존스 홀은 그 비극을 어떻게 살아냈을까? 손바닥에 화상을 입는 정도로는 그 아픔이 견뎌질 리 없었을 것이다. 견딜 수 없지만, 콘래드는 죽었다.
우리는 늘 반복되는 일상은 그저 그렇게, 그냥 받아들이면서 살아간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 생생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모면하기 위해 의미를 밝히려 들게 된다. 그런 노력은 고통을 조금도 상쇄하지 못한다는 진실에 이내 굴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You can't wake up if you don't fall asleep." 섬광이 비치듯 의미를 깨우치는 순간은 잠든 채로 흘려보내는 시간이 축적된 다음에 찾아온다. 그러니 언젠가 완벽한 의미를 알게 되든 말든 지금 이곳에서 불완전한 삶을 살아내면 그만이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