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
표면이 매끈하고 짙은 외계 비행 물체가 미국, 중국, 베네수엘라 등 전세계 12개국에 동시에 나타난다. 인류는 비행 물체에 타고 있는 외계 종족을 일곱 개의 다리라는 뜻의 '헵타포드'라고 부른다.
미국 군 당국은 언어학자 루이스 뱅크스(에이미 아담스)와 이론 물리학자 이안 도널리(제레미 레너)에게 헵타포드가 지구에 온 목적을 밝히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에게 중대한 질문을 하기에 앞서 명확한 의사소통을 위해 언어 교환을 진행한다. 헵타포드에게 인간의 언어를 알려주고 자신도 헵타포드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인다. 할펀 요원(마이클 스털버그)은 헵타포드를 적으로 상정하고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운다. 뉴스를 통해 겁에 질린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그릇된 믿음에 기대어 집단 자살까지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인터넷 방송은 이때다 싶어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에 동조한 일부 군인들은 비행체 안에 폭탄을 설치한다. 크고 작은 소동들은 익숙했던 과거의 내 세상을 침범당하지 않으려는 절박한 몸부림이다.
한편 무언가를 깊이 이해한다는 건 그것이 나를 깊숙이 바꿔 놓도록 허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헵타포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이해하고 싶다면 방호복을 벗고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법이다. 헵타포드와 소통을 거듭하면서 루이스는 언어 구조가 사고 구조를 결정한다는 사피어-워프 가설처럼 헵타포드 언어를 습득하면서 의식의 변화를 겪는다.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어린 아이에 대한 기억이 의식 속에서 서서히 피어오르지만, 루이스는 아이를 낳은 적이 없다.
마침내 루이스는 선형적인 시간 개념이 없는 헵타포드의 사고 구조에 따라 자기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알게 된다. 미래의 자신이 쓴 헵타포드 언어 교과서를 기억해 지금 헵타포드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미래에 만난 섕 장군(지 마)이 알려준 개인 번호로 지금 전화해 중국이 헵타포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설득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에 대한 기억은 자신의 미래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미래를 안다는 건 어떤 감각일까? 루이스는 자신이 이안과 사랑에 빠지고 딸 한나를 낳지만, 한나가 희귀병에 걸려서 일찍 죽으리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런데도 아이를 가지자는 이안의 다정한 목소리가 주는 떨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엄마를 사랑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하는 한나의 변화무쌍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알면서 지구에 왔을 헵타포드 종족의 애봇은 일부 군인들이 비행체에 설치한 폭탄이 터질 때 루이스와 이안을 끝까지 보호하고 죽음의 과정에 접어든다.
'미래를 안다'보다는 '전체를 본다'가 루이스와 헵타포드의 의식 상태를 더 정확하게 표현하는 듯하다. 삶의 처음과 끝을 한꺼번에 조망하는 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얽혀 있으며 어느 한 조각이라도 빠질 수 없이 온전함을 본다. 루이스는 이안이 떠나고 한나가 죽는 일마저도 온전한 자기 삶의 일부임을 보았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헵타포드들은 지금 인류를 도와야 3000년 뒤에 인류의 도움을 받아 종족을 보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이안은 전체를 못 보는 채 단편적인 지식으로 딸아이의 이른 죽음을 접한다. 그리고 루이스의 '선택'에 분노한다. 그는 루이스가 자기 삶 전체를 알면서 그대로 살아가는 일이 그녀의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루이스는 그저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모든 순간에 미래를 안다고 해서 조금도 상쇄되지 않고 삶을 뒤덮는 기쁨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 전체의 온전함을 보는 것과 삶을 살아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루이스는 이안의 품에 처음 안겨 보고서야 그의 품이 얼마나 좋았는지 실감한다. 루이스가 이안을 사랑하게 된다는 걸 미리 안다고 해도, 사랑에 빠지는 순간 루이스와 이안은 생생한 미지(未知)의 영역에 동등하게 들어선다. 다시 말해 미래를 안다는 건 기지(旣知)가 아니다.
이제 루이스에게 삶이란 있는 그대로의 온전함 그리고 아름다움을 수긍함이다. 그리고 사랑은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기 위한 선택이 아닌 함께하는 모든 순간들에 온전히 몰입하는 일관된 태도이다. 사랑으로 충만한 현장 안에서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나, 미래에 대해 모르는 너라는 구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루이스가 이안을 만나 한나를 낳고 기른 그 모든 순간들은 고통스러운 이별로도 결코 무효화되지 않고 온전한 삶의 일부로서 영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