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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지 않은 아기를 돌보는 사랑

영화 <아가씨>

by 다정

일제강점기 조선, 일본 순사들이 열을 맞춰 길을 걸어가고 동네 아이들이 꺄르륵 웃으며 따라다닌다. 한 순사가 칼을 뽑아 위협하고, 달아나는 아이들에게 치여 갓난아기를 안은 숙희(김태리)가 휘청인다. 숙희는 보영당 식구들 품에 있는 아기들에게 하나하나 입을 맞춘 뒤 기차를 타러 떠난다. 그리고 코우즈키 저택에 하녀로 들어간다. 사기꾼 후지와라 백작(하정우)과 손을 잡고 거액을 상속받은 일본인 고아 히데코(김민희)를 등쳐 먹기 위해서다.



가엽구나, 가짜에게 마음을 뺏기다니


히데코에게는 조선인 이모부가 있다. 코우즈키(조진웅)는 한일 합병에 공을 세워 부를 축적한 것으로도 모자라 일본인 성씨를 갖기 위해 몰락한 귀족 가문의 딸과 결혼했다. 부인의 언니에게서 난 히데코는 부모가 모두 죽은 뒤 코우즈키 저택에서 지내게 되었다. 코우즈키 부인은 이미 죽었고, 코우즈키는 히데코가 성인이 된 다음 결혼해서 히데코의 재산을 모두 손에 넣으려 한다. 유명한 수집가의 서재가 통째로 경매에 나올 예정인데 그가 가진 돈만으로는 사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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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삭빠른 조선인들은 코우즈키처럼 나라를 팔아먹지는 않더라도 누군가를 속여서 먹고살 길을 모색한다. 후지와라 백작은 히데코를 유혹해 결혼한 다음 정신병원에 가두고 재산을 챙길 계획이다. 그 과정에서 숙희가 히데코 곁에서 마음을 떠보고 후지와라 백작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빼돌리기로 한다. 그녀는 옥주라는 이름으로 들어가지만 일본식을 동경하는 코우즈키 저택에서 타마코로 불린다.


유명한 여도둑의 딸 숙희는 소매치기 기술과 보석 감정 능력 등을 두루 갖춘 사기꾼 유망주다. 그런데 그녀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건 모성애다. 보영당에서는 버려진 갓난아기들을 돌봐 자식이 없는 일본인 가정에 보낸다. 끝단이(곽은진)는 제 자식에게만 젖을 주지만, 숙희는 젖이 나온다면 모든 아기들을 품고 싶다. 너무 어릴 적에 어머니가 죽어서 기억조차 없지만, 어머니가 살아있었더라면 자신에게 아낌없이 주었을 법한 사랑을 가늠하여 아기들에게 쏟는다.


비록 사기를 치러 왔지만 숙희는 하녀로서 히데코 아가씨를 아기 돌보듯 보살핀다. 후지와라 백작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히데코를 향이 나는 물에 씻기고 단추가 잔뜩 달린 화려한 옷을 입힌다. 지금껏 제 손으로 씻기고 입힌 아기들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다. 그러나 아기를 돌볼 때와는 다른 점이 있다. 히데코의 벗은 몸을 보면 그 달콤함을 한 번 만져 보고 싶은 욕구가 인다. 귓가에는 욕조에 앉은 히데코의 뾰족한 어금니를 은골무로 갈면서 주고받은 숨소리가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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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에는 다른 존재의 미래를 함부로 정해버리는 야욕이 여러 겹 쌓여 있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를 본떠 조선의 사회·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겠다고 주권을 빼앗았다. 코우즈키는 조선은 추하고 일본은 아름답다는 이유로 기꺼이 동조한다. 코우즈키 부인(문소리)은 코우즈키에게 일본인 성씨를 내어주고 정신적 학대 끝에 죽었다. 히데코는 이모에게서 자신의 장래를 읽는다. 그리고 후지와라 백작과 숙희 역시 그녀를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다.


사실 히데코는 숙희의 속셈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숙희를 히데코의 이름으로 정신병원에 집어넣기로 후지와라 백작과 합의했다. 폭력과 탐욕의 압력은 더 약하고 힘없는 이에게 계속 떠넘겨지기 마련이다. 코우즈키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폭압을 내면화하고, 코우즈키에게 삶을 송두리째 유린당하는 히데코는 연고 없는 어리숙한 하녀 하나를 사지로 몰려고 했다. 많고 많은 계집 중에 하필 숙희가 나타날 줄은 모르고.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히데코가 신사들을 위한 낭독회에서 읽는 건 코우즈키가 수집하는 음란 서책이다. 코우즈키는 변태적인 글과 그림을 모으는 악취미를 즐기는 데에 과거 코우즈키 부인 그리고 지금은 히데코를 동원한다. 심지어 코우즈키는 글만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체위는 히데코에게 직접 시범을 보이게 한다. 낭독회에 오는 남성들은 머릿속에 그리는 변태적인 성행위에 눈앞의 히데코를 대입한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히데코라는 사람을 서책 속 가짜 욕정으로 덮어쓴다.


두 여성 간 성행위를 그린 서책을 낭독하며 히데코는 처음으로 자신과 연결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발견한다. 정전으로 신사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히데코는 숙희와의 사랑을 그리며 낭독을 이어간다. 코우즈키와 신사들은 어느덧 예술가의 경지에 다다른 듯한 히데코를 치켜세운다. 그들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순간 사실 히데코의 머릿속에서 남성은 배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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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시대에 꽃피는 사랑은 거짓으로 시작한다. 서책을 낭독하고 온 히데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숙희를 속여서 관계를 시작한다. 숙희도 후지와라 백작을 떠올리라고 하면서 히데코를 어루만진다. 하지만 절정에 가서 숙희는 히데코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히데코 또한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이제 숙희만 곁에 있어준다면 굳이 저택을 벗어나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숙희가 후지와라 백작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말하자 히데코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절망을 느낀다.


히데코는 손 닿을 곳에 죽음을 두고 살았고, 숙희는 이제 막 탄생한 갓난아기들을 돌보며 살았다. 히데코는 이모가 죽은 채 발견된 벚나무에 종종 매달리곤 했다. 처음 삶의 희망을 품게 한 숙희가 사랑을 부정하자 히데코는 밧줄을 들고 벚나무로 달려간다. 숙희가 히데코의 추락을 막고 두 사람은 서로를 속이려 했음을 고백한다. 탄생과 죽음 사이 삶의 한가운데 지점에서 만난 두 사람은 코우즈키나 후지와라 백작이 짜 놓은 미래를 함께 찢어발긴다.


그리고 숙희는 히데코가 고립된 채 평생 겪은 수모를 이해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된다. 마지막으로 서재에 들린 히데코는 후지와라 백작이 그린 모욕적인 그림을 보여 준다. 사랑하는 사람이 겪은 고통은 깊은 분노를 일으킨다. 히데코는 코우즈키의 더러운 욕정을 장갑을 끼고 소중하게 다루도록 훈련받았다. 하지만 숙희는 서책들을 갈가리 찢고 물에 빠뜨린다. 긴 시간 겁에 질려 끔찍한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히데코는 그제야 마땅히 해야 했을 응징에 동참한다. 마침내 두 사람은 저택 담장을 넘어 들판을 달려 나간다.



사기꾼이 사랑을 아나?


후지와라 백작은 히데코를 처음 본 순간부터 소유하고 싶었던 듯하다. 히데코와 결혼 후 재산 빼돌리기까지 마친 그는 숙희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히데코에게 다시 청혼한다. 사기꾼이 동료를 좋아하는 것이 불법인 줄 알면서도 히데코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는 히데코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많다. 평생 서책을 낭독했지만 직접 경험해 본 적은 없을 히데코에게 남자만이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욕구가 남아있으리라 넘겨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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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머슴 출신에 본명은 고판돌인 후지와라 백작은 가짜를 잘 알아본다. 사기 쳐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사람은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안목이 곧 생명줄이다. 그는 일본을 동경하는 조선인 코우즈키가 일본인 귀족에게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용하고, 조선 대도의 딸 숙희에게 어리숙한 면이 있음을 알아본다. 그런데 보영당에 방문해 계획을 말하는 내내 숙희는 아기를 소중히 안고 있었다. 낳지 않은 아기를 성심성의껏 돌보는 사랑이 가지는 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후지와라 백작을 비롯해 낭독회에 오는 신사들은 욕정으로 조작된 환상이 곧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그 이미지는 남자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며 반드시 남자가 포함되어야 완성된다. 여자는 남자의 각본 안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머릿속 환상에 머무르며 타인을 단정 짓는 자는 소통에 둔감해진다. 공작부인 줄리에트를 떠올리는 후지와라 백작의 강압적인 애무에 히데코의 얼굴은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다. 히데코의 몸짓은 당신이 싫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사랑을 흉내 내던 사기꾼은 결국 비참한 꼴을 당한다. 코우즈키는 제책 도구들을 이용해 후지와라 백작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기화한 수은 연기에 쓰러진다. 연기를 들이마시며 후지와라 백작은 뒤늦게 히데코와 숙희의 사랑이 얼마나 명백했고 자신의 눈이 얼마나 어두웠는지 깨닫는다.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난 히데코와 숙희는 홀가분하게 상해로 향한다. 오직 두 사람만 있는 공간에서 어린 히데코를 괴롭혔던 방울을 이용해 서로에게 쾌락을 선사한다. 왜 하필 방울인가? 영화는 일본 순사 행렬을 따라다니는 아이들로 시작했다. 그 시절 아이들이 모방할 만한 별다른 놀거리가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한된 생활 반경 안에서 서책을 통해서만 관계를 배운 히데코는 다른 형태의 유희를 아직 모른다. 시대의 한계는 곧 놀이의 한계이자 사랑의 한계가 된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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