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밤이면 마작 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한다. 그곳에서 손님들이 어느 기이한 할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할머니는 해가 뜨기 전에 유모차를 끌고 돌아다니는데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츠네오는 노망 난 할머니가 손주 미라를 태우고 다니는 거 아니냐고 농담처럼 말하고, 다른 손님들도 돈다발이니 약이니 함부로 말을 얹는다.
밤을 지새운 츠네오는 게임방 사장님의 강아지를 산책시킨다. 그런데 터덜터덜 걸어가는 츠네오 뒤로 유모차가 내리막에 미끄러져 가드레일에 부딪친다. 유모차를 놓친 할머니(신야 에이코)가 유모차 안을 살피라고 부탁하자 츠네오는 담요를 조심스레 걷어낸다. 쿠미코(이케와키 치즈루)가 잔뜩 움츠리고 있다가 츠네오에게 칼을 휘두르고, 츠네오는 놀라 주저앉는다. 이런저런 추측과 달리 유모차에는 살아있는 인간이 타고 있었다.
츠네오는 할머니 대신 집까지 유모차를 밀어준다. 보답하기 위해 쿠미코와 할머니는 츠네오에게 아침밥을 대접한다. 다리가 불편한 쿠미코는 의자 위에서 요리를 하다가 다이빙을 하듯 몸을 던져서 내려온다. 낯선 상황에 계속 불편해하던 츠네오는 쿠미코가 만든 맛있는 요리에 반해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운다. 쿠미코는 당연히 맛있을 거라며 시큰둥하게 책을 읽는다. 츠네오는 그녀에게 순수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녀는 츠네오에게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인 '조제'로 스스로를 소개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사랑 영화를 떠올릴 때면 자주 호명된다. 츠네오는 매사에 즉각적이고 투명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고, 조제는 몸 움직임이 불편한 다독가이며 요리 실력이 일품이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헤어진다. 영화는 사랑의 정점에서 고양된 감정을 그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랑이 수그러드는 마무리까지 고스란히 보여 준다. 그것이 헤어짐으로 마무리되는 대부분의 연애와 닮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랑 이야기를 특별하게 여기는 게 아닐까.
그런데 조제와 츠네오의 사랑은 저절로 소멸하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허물어진다. 그들은 신체적 기능만으로 조제를 규정하고, 당연히 츠네오가 조제를 보살피는 입장이라고 짐작한다. 내뱉고 있는 말이 조제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그녀에게 비수가 되는 말과 시선을 던진다.
조제의 할머니부터 불편한 신체가 조제의 세상을 좁혀야 하는 근거라고 강력히 믿는다. 할머니에 따르면 스스로 조심하고 세상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 사회적 약자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그래서 거리에 사람이 없는 새벽에 조제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나가고, 교육 기관에 보내는 대신 길에서 책을 주워다 준다. 어린 조제는 할머니의 가르침을 거역할 수 없었다.
조제도 넓은 세상을 보고 경험하는 즐거움을 안다. 평소 조제는 약자로 취급받기 싫어서 위악을 부리지만, 산책을 꼭 가야 하는지 묻는 츠네오에게 어떤 방패막을 세울 새도 없이 숨 넘어갈 듯 항변한다. 봐야 할 게 많다면서 고작 꽃과 고양이를 말한다. 할머니의 도움 없이는 멀리 나갈 수 없는 조제에게는 그게 세상의 전부다. 그녀가 길에서 주운 책을 닳도록 읽는 건 자신의 세상이 쪼그라들게 두지 않으려는 저항이다. 소설의 다음 내용이 당장 궁금해도 누군가 책을 버리기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다. 하지만 활자 안에서 조제는 누구보다도 넓은 세상을 꿈꾸는 어엿한 인간이다.
하지만 조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인간 조제가 안 보인다. 조제네 집에 공사를 맡은 매니저(이타오 이츠지)는 츠네오의 '봉사 정신'을 칭찬하고, 그곳에 무턱대고 찾아온 카나에(우에노 주리)를 츠네오의 애인이라 넘겨짚는다. 사회복지를 공부한다며 견학을 핑계로 찾아온 카나에는 츠네오에게 잘 보이려 할 뿐이다. 그녀는 허락 없이 조제네 집에 들어가 조제가 아닌 매니저에게 인사를 하고 실컷 둘러본다.
츠네오에게 카나에는 조제의 '다이빙'이 보고 싶다고 말한다. 조제에게 다이빙은 주어진 신체에 적응하며 생긴 생활 방식인데, 카나에는 그것을 서커스 구경하듯 보기 원한다. 오랜 시간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조제는 낯선 사람들이 던지는 비수를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배운 적 없다. 그날 밤 조제는 들끓는 수치심과 분노에 치를 떨며 츠네오를 거부한다.
두 사람은 화해하고 연인이 되지만, 그 후로도 녹록지 않다. 츠네오의 동생 카타시는 조제를 처음 만난 날 장애인이랑 처음 말을 해본다고 호들갑을 떤다. 츠네오가 사랑하는 건 장애인이 아닌 조제인데 말이다. 만남이 지속되고 츠네오가 가족 제사에 조제를 데려가기로 한다. 타카시는 츠네오가 장애인 애인을 데려오면 참 좋아할 거라는 실없는 소리를 한다. 그는 여전히 인간 조제를 못 알아본다.
그런데 말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츠네오도 주변 사람들의 편견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츠네오는 타카시에게 제사에 가지 않겠다고 연락한다. 타카시는 자신이 없어진 거냐고 묻고, 츠네오는 아무 말도 못 한다. 과연 이대로 조제에게 내리 꽂히는 비수를 함께 맞으며 계속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가장 아플 건 조제이지만,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볼 자신도 없다. 그렇게 사랑이 채 식기도 전에 망가져 간다.
츠네오에게 헤어지고도 친구로 남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조제는 그럴 수 없다. 그는 이별의 이유를 분명하게 밝힌다. 자신이 도망쳤다고. 츠네오는 조제와 함께하는 사랑이 너무 아파서 도망쳤다. 조제가 앞으로 홀로 감당할 상처도 짐작할 수 있기에 앞으로도 아플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은 편견과 비수에 무참히 상처 입었다.
사실 영화는 처음부터 종결된 사랑에 대해 말한다는 걸 드러냈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조제가 찍었을 사진들이 차례로 넘어가고 기억을 되짚는 츠네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조제에게 처음 바다를 보여준 날의 사진들을 보며 그때가 그립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게 몇 년 전인지 가물가물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영화는 헤어짐으로 끝나지만 츠네오는 훨씬 더 긴 여파를 앓고 있는 듯하다.
한편 혼자가 된 조제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장을 봐 온다. 유모차에 스케이트보드를 연결하고 괜히 옆에 가는 자전거와 속도 경쟁을 하는 츠네오는 곁에 없다. 조제는 집에 돌아와서 스스로를 위한 요리를 한다. 생선 익는 소리가 퍼져 나가는 공간에 조제를 부르는 목소리도 없다. 내내 고립되어 있어서 외로운 줄도 몰랐던 조제는 츠네오를 만나 깊고 깜깜한 바다에서 헤엄쳐 나왔다. 이제는 선명하게 감각되는 부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조제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을 열렬히 좋아해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지만 할머니는 계속 원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인생에 갑자기 나타난 츠네오는 조제라는 새로운 인격을 기꺼이 인정하고 존중했다. 그래서 츠네오에게 마음을 열었는지도 모른다.
츠네오가 잠시나마 함께하는 동안 조제는 쿠미코가 아닌 조제로서 단단해질 수 있었다. 츠네오와 함께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호랑이와 물고기도 보았다. 츠네오가 도망쳤다고 하지만, 조제가 이별 이후의 삶을 의연하게 이어갈 힘을 얻은 것 또한 츠네오 덕분이지 않을까. 그러니 두 사람의 사랑을 무용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함부로 말하는 이가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