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몰리스 게임>
각본가 아론 소킨은 대중이 좋아하는 이야기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 훨씬 더 무게를 두는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에는 매번 지적이고 정의로운 인물이 엄청난 양의 대사를 통해 이상적인 가치를 설파한다. 똑똑하고 자기 잘난 줄 아는 인물의 일장연설에 모든 사람이 마음을 여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론 소킨은 가치 있다고 믿는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TV 시리즈 <웨스트 윙>은 이상적인 국가 지도자를 그리고, TV시리즈 <뉴스룸>은 불완전한 인간이 정의로운 언론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아론 소킨의 감독 데뷔작 <몰리스 게임> 역시 쉴 틈 없이 내레이션과 대사를 쏟아낸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론 소킨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 몰리 블룸(제시카 차스테인)이 하는 말에 최대한 귀를 기울인다. 몰리 블룸은 부상당한 스키 선수에서 거액의 판돈이 오가는 포커 하우스 운영자로 거듭난 인물이다. 야망이 계속 부풀어 가던 중 순식간에 중범죄자로 낙인찍히면서 그녀의 삶이 또 한 번 크게 어그러진다.
그녀의 발언권은 수시로 묵살되어 왔다. 영화 오프닝 타이틀 앞뒤로 아버지가 통증과 피곤함을 호소하는 어린 몰리를 모른 체하는 장면 그리고 FBI가 적법한 절차 없이 몰리를 체포하는 장면이 배치되어 있다. 포커 하우스에 드나드는 남자들은 몰리의 주관과 신념을 존중할 줄 모르고 비열한 방법으로 그녀를 내친다. 그녀의 존재가 사회에 알려진 뒤에는 포커 판에 있던 거물급 인물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가십의 여왕 자리를 강요받는다.
궁지에 몰린 몰리는 형사변호사 찰리 재피(이드리스 엘바)를 만나고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재피도 처음에는 편견을 가지고 그녀를 대하지만 점차 생각이 바뀐다. 이는 아론 소킨이 겪은 인식의 변화를 닮아 있다.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 몰리 블룸은 책을 출간하고 아론 소킨에게 먼저 연락해 영상화를 제안했다고 한다. 아론 소킨은 인터넷에서 얻은 얄팍한 정보만 가지고 몰리에 대해 짐작했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는 불운한 상황에도 움츠러들지 않는 한 인간을 알아가는 경이를 경험했다고 밝혔다.
영화 내내 재피의 질문은 몰리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재피를 따라 관객도 몰리라는 사람의 여러 면을 알아간다. 몰리는 스포츠 선수로 활약하며 끝없는 경쟁을 몸에 익혔고, 지적 수준도 매우 높다. 주변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기민함 덕분에 포커 판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곧잘 알아챈다. 한때 약물에 중독됐지만 며칠 동안 연달아 밤을 새우는 포커 하우스를 운영하기 위해 자기 의지로 끊는다.
그리고 야망을 좇겠다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 들지도 않는다. 돈을 보고 포커 하우스를 차렸지만, 고용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고 법에 저촉되는 일을 피하려 한다. 게다가 도박에 중독된 사람을 만나면 진심으로 그를 도우려 한다. 모든 걸 잃은 뒤에도 가십거리를 팔아먹거나 신상을 함부로 떠벌리지 않는다. 실제로 원작 도서 『Molly's Game』에는 이미 FBI 조사에서 밝혀진 이들만 실명으로 등장한다.
영화 속 몰리는 자신에게 남은 건 이름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는 몰리 블룸이라는 사람의 진가를 보여 주고자 한다. 그녀는 노골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도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았으며 불리한 선택을 감수하더라도 존엄을 지키려 한다. 그녀에게는 존엄한 인간의 이야기가 남았다. 재피가 몰리의 발언권을 되찾아 주듯이, 아론 소킨 역시 영화로써 몰리의 발언권을 복구한 듯하다.
몰리는 불법도박 외 20개 혐의로 기소되어 법정에 선다. 재피는 다른 선택지를 제안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저지른 잘못뿐만 아니라 부풀려진 혐의까지도 담담히 인정한다. 이에 판사는 월가에서 아침부터 점심까지 저지른 범죄가 훨씬 중할 거라고 말하며, 사회봉사 200시간과 보호관찰 1년, 약물검사, 벌금 20만 달러를 선고한다.
재판이 끝나고 몰리는 '이제 뭘 하지?'라고 자문한다. 영화는 그녀가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사고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장면으로 답한다. 몰리는 12살에 척추측만증 수술을 받아 누워 있다가도 스키를 다시 시작했고, 불운의 사고로 스키를 그만두었지만 규모가 남다른 포커 하우스를 세웠다. 비록 불운과 잘못된 선택으로 기나긴 하강 운동에 휘말렸더라도 멈춰 세우고 다시 올라갈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것이 몰리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준 이들에게 영화가 남기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