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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심소현 Oct 19. 2021

착한 아이가 아닌 온전한 아이로 키우기

첫째가 5세, 둘째가 3세 때 가정보육을 했기 때문에 우린 놀이터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아침 먹고 느지막이 놀이터에 나가보면 또래 아이들은 없었다. 보통 그 연령대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가거나 유치원에 가기에 오후 늦게나 또래 친구들이 나왔다. 대신 점심만 먹고 일찍 하교하는 초등학생 형들이 보였다. 아이는 형들과 함께 놀고 싶어서 가까이 가서 놀자고 했다. 같이 껴주는(?) 친절한 형들도 있었지만 아닌 형들도 많았다. 그러면 아이는 형들이 자기랑 안 논다며 풀이 죽어 시무룩해졌다. 때론 울기 거나 화를 내기도 했다. 또래 친구들과 놀다가도 의견이 안 맞거나 요구가 수용되지 않을 때면 많이 속상해했다. ‘그냥 거절당하면 혼자 다른 놀이를 하거나 동생이랑 놀 것이지. 아.. 정말 피곤하다.’ 나도 내심 속상했지만 아이를 달래주려 애썼다. 기분이 나아져 다시 다른 친구랑 놀 때도 있었지만 계속 속상해하며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점점 화가 났다. “친구랑 놀 때는 그럴 수 있는 거야!! 니 마음대로만 될 수는 없어! 그렇게 자꾸 속상해하고 화 낼 거면 이제 놀이터 나오지 마!!” 달래도 달래지지 않는 아이를 보며 어느 순간 나는 상냥한 엄마에서 악쓰는 엄마로 돌변해 있었다.




아이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처는 바로 그들의 진정한 자아가 거부되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들의 감정이나 욕구, 바람이 무엇인지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부모가 아이의 진정한 자아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에게는 거짓 자아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러한 거짓 자아는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하게 되고 가족체계가 요구하는 대로, 또 문화적인 성 역할에 따라 강화된다. 그리고 점차 그 거짓 자아가 마치 자신의 진정한 모습인 양 생각되어 버린다. 사실은 거짓 자아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각본에 따라 자신이 했던 연기라는 것을 결국 잊어버리게 된다.                                      


 <상처 받은 내면 아이 치유> 중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말할 수 있고 하염없이 시무룩해질 수도 있다. 화가 나면 화를 낼 수도 있고 슬프면 울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의 그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지 못한다. 아이가 속상해하면 ‘뭐 그런 일로 속상해해’라며 아이의 감정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화가 나서 부모 앞에서 툴툴거리면 ‘어른 앞에서 버릇없이 뭐 하는 거야’라며 도리어 혼을 낸다. 아이가 울면 ‘이제 그만 울고 뚝 그쳐. 사람들 보기 창피하다.’라며 아이를 억압하고 수치심을 준다. 부모가 그러는 것도 모자라 산타 할아버지까지 나서서 아이들의 울음을 억압한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아이들이 열광하는 국민 캐릭터 뽀로로는 한 술 더 뜬다.


"착한 어린이는 다투지 않아요 /누가 누가 뭐라 해도 하하하 웃지요/

언제나 친구들과 사이좋은 가장 착한 어린이는 바로바로바로 나 나 나 뽀로로.

착한 어린이는 울지도 않아요 /누가 누가 뭐라 해도 하하하 웃지요 /

넘어져도 일어나 활짝 웃는 가장 착한 어린이는 바로바로바로 나 나 나 루피.

착한 어린이는 장난치지 않아요 / 누가 누가 뭐라 해도 하하하 웃지요 /

언제나 친구들을 도와주는 가장 착한 어린이는 바로바로바로 나 나 나 에디."



울지도, 다투지도, 장난치지도 않고 누가 뭐래도 하하하 웃는 아이. 이게 가능한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이건 어른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 된다. 슬프면 울어야 하고 넘어져서 아프면 속상해 할 수 있고 의견이 다르면 충돌이 있을 수도 있다. 어른들의 의무는 이 모든 것을 못하게 억압하며 착한 아이로 자라나게 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게 아이들을 안내해 주고, 다툼이 있으면 갈등을 어떻게 건강하게 풀어나갈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사 속에 교묘히 담겨 있는 이데올로기를 어른들은 모른 척하고 묵인한다. 아이들을 착하게 크게 하는 것이 어른들의 지상 최대 사명인 양 자신들의 생각으로 아이들을 주무르려는 이런 노래 가사는 감히 말하 건데, 폭력적이다.


일본 최고의 교육심리학자인 가토 다이조는 자신의 책, <착한 아이로 키우지 마라>에서 ‘착한 아이콤플렉스’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친구들과 다퉈도 안 되고, 울어도, 장난쳐도 안 된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어린이’ 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다. 더 이상 어린이로 살지 말고 애늙은이로 살라는 말이다.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18세기까지 아이들이 ‘작은 어른’으로 살았던 것처럼 모든 욕구와 감정을 억누른 채 어른들처럼 행동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과는 다르다. 완전히 다른 존재다. 아이들은 행동하면서 배운다. 친구들과 다툰 후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바람직한 관계 형성에 대해 배우고, 장난치면서 창의적으로 노는 법을 배운다. 울음을 통해서는 지금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 지를 배운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이 왜 소리를 지르는지, 왜 화를 내는지, 왜 속상한지 묻지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아이가 느끼는 감정들, 화, 슬픔, 아픔 등을 느끼게 해 주고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려주기는커녕 그 감정들을 그저 억압한다. 화내지 못하게, 속상하지 못하게, 울지 못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에게 했던 대로,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부정하고 억압한다. 이를 정신분석학에서는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방어기제는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자신의 논문에서 처음으로 명명하고 그의 딸 안나 프로이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감정적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 의식이나 행위’를 말한다. 부모가,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감정이기에 자신들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부정하거나 억누르며 ‘아닌 척’ 하는 착한 아이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방어기제들은 원래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상황, 그리고 그와 결부된 감정을 억압하는 현상과 함께 나타난다. 부모의 욕구에 적응하는 것은 흔히 ‘마치 ~ 인 것처럼 행동하는 가상 인격’, 즉 거짓된 자아를 만들어 가게 한다. 그런 사람은 오로지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며, 자신의 인위적인 행동에 스스로도 완전히 도취된다. 그러면 더 이상 참된 자아를 갖지 못한 채 살게 된다. 당연히 자신만의 개성을 가질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지도 못한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게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고향을 잃은 것 같다고 호소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텅 비었다는 느낌과 심리적 빈곤, 고유한 소질의 말살 들은 그들이 어렸을 때 실제로 겪었던 일들이기 때문이다. 생명력과 주체성과 생동감 또한 뭉개지고 짓밟혔다.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드라마> 중에서




아이들은 부모를 조건 없이 사랑한다. 엄마 자신은 스스로를 못났다고 느낄지언정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엄마 모습을 사랑한다. 아침에 일어나 부스스한 모습에 머리도 안 감고 세수도 안 해도 아이들은 “엄마~~”라고 부르며 품에 안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유능한 엄마가 아니어도, 공부를 못했던 엄마여도, 심지어 부모들이 그렇게 목을 매는 이른바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엄마여도 아이들은 엄마를 사랑한다. 음식을 잘 못해서 냉동식품을 데워줘도 우리 엄마는 요리사라고 치켜세워 주고 별 것 아닌 그림도 잘 그렸다고 엄지 척 칭찬을 해준다.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엄마이기에, 아이들은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엄마 모습을 사랑한다.


그러나 부모인 우리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감격에 겨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했던 다짐은 점점 흐려지고 각종 조건을 내건다. “숙제 안 하면 놀이공원 안 데려갈 거야.”, “이렇게 계속 울면 장난감 안 사줘.” “안 먹으면 못 놀아.”라고 으름장을 놓고 때론 “지금 안 자면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 라며 무섭게 겁을 주고 협박(?) 하기도 한다. 이렇게 계속 조건을 달며 아이를 부모의 입맛대로, 조종하려 들면 들수록 아이는 자기 스스로를 죽이고 부모의 말을 따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에게 버려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기에, 방어기제를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억압하고 감정을 부정하게 된다. 그래야 부모의 인정과 사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점 부모 말씀 잘 듣는, 아니 부모가 원하는 모습대로 커가는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어 부모에게 반항하고,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중2병’에 걸리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칼 융은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도,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도 없다. 단지 우리 모두 내면에 있는 선함과 악함을 인정하고 보다 선함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아갈 뿐이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집단 문화에서 인정하지 않아 나쁘다고 인식되는 내 안의 ‘그림자’를 자각하고 알려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남들 보기에 착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내 아이의 욕구를 억누르지는 않았는지, 나쁜 아이로 손가락질받는 게 두려워 아이에게 겁을 주고 착한 행동을 강요 하진 않았는지 부모인 내가 돌아보는 것만이 내 아이를 살리는 길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길 바란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훈계나 잔소리가 아닌, 그저 따뜻한 시선과 사랑의 말을 듣길 원한다. 매 순간 판단하고 평가하는 감시자가 아닌, 무엇을 하더라도 자신들을 항상 지지하고 응원해주길 바란다. 조건을 내거는 사랑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길 원한다. 그게 우리 아이들이 원하는 전부다. 그리고 그것만이 내 아이가 착한 아이가 아닌 '온전한 아이'로 자랄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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