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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심소현 Oct 11. 2021

내 안에 울고 있는 또 다른 나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리다.

두 아이들과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면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바라 볼 여유 조차 없었다. 카메라 앞에 서기 전, 자연스러운 표정과 발음을 연습하기 위해 매일 거울을 들여다봤던 나로서는 이러한 생활을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이제는 거울을 보며 나를 꾸미는 건 완전한 사치가 되어 버렸다. 가끔 거울 앞에 서 있는 웬 거무죽죽한 피부의 아줌마를 보며 ‘이게 나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서글프기도 하다. 그렇게 나의 30대는 지나갔다.


육아를 하며 집에만 있으면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든다. 책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티브이 프로그램을 일절 보지 않았고 매일 들춰보던 신문은 이제 아이들의 가위질 놀잇감으로 전락했다. 매일 아침 블룸버그 통신과 경제 뉴스를 체크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던 나는 ‘이렇게 세상일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매일 해가 뜨고 지는구나’를 새삼 느꼈다. 두 아이와 붙박이로 늘 집에 붙어 있으니 인간관계도 제한됐다. 비슷한 시기에 출산을 한 친한 친구 몇 명을 제외하고는 소원해졌다.


그러다 보니 나의 삶은 정체되어 있고 퇴보하는 듯했다. 이렇게 아이들 뒷바라지하다 늙는구나 싶었다. 그런 날 머리에 불쑥 올라온 새치라도 발견하면 하염없이 우울해졌다. 젊음을 숭배하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늙어간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었다. 광고에는 늘 여성의 안티에이징을 부르짖는다. 남자 배우는 주름이 늘어 가면 ‘연륜이 생긴다’고 말하지만 여자 배우에게는 ‘이제 저 배우도 늙었네. 주름 좀 봐.’ 라며 관리를 안 한 배우로 취급받는다. 여러모로 여성에게 가혹한 사회다.


내 처지가 참 불쌍하게 느껴졌다. 일과 육아 모두 성공하고 싶었던 나는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전향했다. 첫째를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스피치 강의도 하고 행사도 뛰고(?) 대학원까지 진학한 나는 '이렇게 일과 육아 모두 잘 해내는 커리어 우먼이 되는구나'싶었다. 그러나 커리어 우먼은 고사하고 집구석(?)에서 머리 질끈 묶고 두 아이와 뒹구는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연년생으로 둘째를 낳은 후 대학원을 휴학했고, 결국 자퇴를 했다. 일은 당분간 할 수 없으니 올 스톱 상태다. 그 와중에 주름과 새치는 부쩍 늘어간다. 계속 공부한 친구는 박사님이 되어 있고, 출산휴가만 마치고 바로 복직한 언니는 차장과 팀장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매일 교복 같은 똑같은 옷에 삼시 세끼 밥 차리고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며 그냥 이렇게 집에서 늙어갔다. 너무 슬펐다.


돈도 못 벌고 사회에는 아무런 기여도 못할 것 같은 불안, 어릴 때 기대했던 사회적 성공과는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 일과 육아 모두 성공적으로 잘하고 싶었지만 어느 것 하나 잘하는 것 없는 것 같은 패배감,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이런 느낌은 나의 자존감을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나는 어두운 터널 안,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만난 심리서적들은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나의 괴로움은 사회가 심어놓은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부모님 말씀 잘 들어야 착한 아이이고, 공부를 잘해야 칭찬받고 인정받을 수 있으며,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경제적으로 돈도 어느 정도 벌어야 한다고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한 채 살아간다. 그게 잘 사는 거고 성공하는 삶이라고 말이다. 엄마인 여성을 보는 시선은 더 가혹하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 사회는 '일도 잘하고 아이도 잘 키우는 여성이 성공한 것'이라는 메시지 무수히 던진다. 광고를 비롯한 여러 매체를 통해 이러한 관념을 은밀히 우리 무의식에 심어놓는다. 이에 아이들을 전적으로 신경 쓰지 못하는 워킹맘은 죄책감을 느끼고, 집에서 살림하는 전업맘은 박탈감을 느낀다. 워킹맘, 전업맘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긴 것만 봐도 사회가 여성을 보는 시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와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자랐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사회가 주는 관념이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저 무비판적으로 그것이 정답인 양 서서히 물든 채 자라난다. 내 안에 또 다른 나는, 이러한 관념에서 나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기에 울고 있는 것이었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욕구가 꿈틀거렸음에도 사회가 요구하는 질서, 규칙, 관념, 통념 등에 순응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거기에 길들여져 있었다. 나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못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내 존재론적 가치를 증명하는 삶을 살았다. 그게 공부든, 학벌이든, 직업이든, 돈이든, 늘 열심히 살았다. 그게 나를 증명하는 길이었고 ‘82년생 김지영’이었던 내가 아들 못지않은 딸이 되는 길이었다. 맏이였던 나는 그게 나의 역할이자 책임이라고 여겼다.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선생님의, 팀장님의, 상무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다. 아니,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착한 딸, 모범적인 학생, 우수한 직원이었지만 나에겐 가혹했다. 내 안의 욕구는 억눌렀고 외면하면서도 그 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내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며 살았다. 그러면 오늘은 좀 힘들어도 내일은 행복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오늘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아이들에게 배웠다. 아이들은 엄마인 나에게 우리가 무엇을 잘하지 않아도, 그 무엇이 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귀하다는 것을 거울처럼 비추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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