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길, 『치유의 빛』
강화길 작가님의 올해 신간. 읽고 싶은 다른 책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사실 늘 그렇긴 함), 갑자기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푸른 표지와 "치유의 빛"이라는 제목. 동네서점에서 유심히 봤던 기억이 나서 읽기 시작했다.
─ 강화길, 은행나무
사람들은 왜 동경하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질투하고 증오할까. 그래서 갖고 싶어 하고,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고 싶어 하고. 불쌍해하다가 미워하고, 안타까워하다가 꺾어버리고 싶어 할까. (p. 69-70)
벗어나고 싶은 과거의 순간이 다들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과거의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지금은?) 과거 사진도 잘 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가볍게 친구들과 추억 회상(또는 미화)하는 것 말고, 과거의 나를 직시하는 일에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편. 그러나 단순히 회피한다고 하여 과거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 잊고 싶은 순간은 더욱 선명해져 꿈속으로, 가끔은 눈앞으로 불쑥 나타나니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그 어두운 그림자를 대체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이 작품도 주인공의 과거에서부터 출발한다. '나'(지수)는 작고 마른 아이였지만, 열다섯부터 급속도로 성장하여 큰 체구와 존재감을 가지게 된다. 그 부피감으로 동경하던 '해리아'에게 관심을 얻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녀는 이때부터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직면하게 된다. 조현칠 교회, 거대한 여성에게 쏟아지는 사회적 시선, 학교, 친구 관계, 부모님께 받은 상처까지 지수에게는 감옥이 된다. 어린 나이에 경험한 강렬한 '수치심'은 그녀에게 큰 상처가 됐다. 그래서 지수는 성인이 되어 고향을 탈출하고, 혹독한 다이어트를 했다. 또한 애인(태수)이 " 너한테는 일이 전부지. 일 외에 의미 있는 게 있기나 해?"(28면)라고 물을 정도로 일과 목표를 향해 달려갔으며, 스스로를 몰아세워 성취감을 얻었다. 자신과 환경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녀는 그렇게 감옥을 탈출했다고 생각했다.
"지수 님."
"네"
"아프면 외로워요. 그렇죠?"
글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외로움. 고립감. 결핍. 그래. 있었다. 통증은 오롯이 내 것이었다.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철저히 나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하지만, 아프기 전에도 그러지 않았나. 내가 혼자가 아닌 적이 과연 있었던가?
그 순간, 지우가 갑자기 내 왼손을 꽉 잡았다. 나는 당황했다. 손을 빼려 했지만, 그녀는 힘이 셌다.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지수 님처럼 오래 아프고 오래 견딘 사람은 드물어요." (p. 183)
왜냐하면 우리는 안티오페를 이해했으니까. 나를 싫어하는 마음. 그래서 나를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 그래서 늘 무언가에 열중하지. 나를 기억하지 않기 위해. 떠올리지 않기 위해. (p. 353)
하지만 그녀는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늘어났고, 급격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거식증, 폭식증, 우울증, 강박증 그리고 이유 불명의 고통에 시달린다. 휴식 차 고향(안진)에 내려간 지수는 엄마가 참여하는 요리 세미나 '채수회'에 채소를 조달해 주는 청년의 아내가 자신의 동창, '신아'라는 사실을 일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과거 회상.
그녀를 옭아맨 과거의 중심에는 '해리아'가 있었다. 해리아는 그녀가 동경했던 친구로, '해리아'라는 애칭도 지수가 붙여준 것이었다. 해리는 지수뿐만 아니라 모두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그런 존재였다. 늘씬하고 큰 키와 우수한 성적, 그리고 다정한 성격까지. 해리가 그녀를 인지한 그 순간부터 지수는 해리아, 그리고 해리아의 곁에서 그녀를 경계하던 신아와 어딘가 위태롭지만 어울려 지냈다. 어느 날 수영장에서 해리아에게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사고 이후 그들은 끔찍한 감옥 속에 갇히게 되었고, 그 고통은 현재까지 이어졌다.
이후 지수는 급작스럽게 어머니까지 잃고, 더욱 극심해진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간다. 더 정확하게는 '채수회관'을 운영하고 있는 '해리아'를 만나기 위해서. 채수회관은 해리(벗)와 신아(심우)가 만든 '치유'의 공간이다. 해리는 사고 이후 극심한 신체적,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다 자신의 곁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신아와 치유의 공간을 만들기에 이른다. 그들이 공동 집필한 책의 이름도 『치유의 빛』이고. 여기는 지수처럼 개인적인 사유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이곳에서는 채식, 명상과 같은 자연 치유법으로 회복과 치유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자 했다. 과연 그곳에서 지수는 '치유의 빛'을 만날 수 있었을까?
'나의 마지막 동굴을 만들 거야. 그게 나의 치유야.' (…) 응, 우리 같은 사람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매는 사람들. 어떤 경계에 서서 울부짖는 사람들. 내 몸을 내 몸처럼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 어떤 경계에 서서 울부짖는 사람들. 내 몸을 내 몸처럼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과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자신만의 기억을 찾을 수 있게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간. 빛으로 이끄는 공간. '아팠지만 아픈지 몰랐던 바로 그때처럼, 나는 다시 살아갈 거야." (p. 336)
그러다 갑자기, 그 사건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다를 두근거리게 하는 것. 기대하게 하는 것. 지금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 예감. 아니 확신.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앞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가 서로를 보지 못하게 된다 해도, 그러니까 이 아이들이 나를 떠나고, 혹은 내가 이들을 떠나게 되더라도, 나는 오늘 이 순간을, 이들이 내게 다가오는 지금을 영원히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 그리하여 미래의 내가 어느 어두운 곳에 갇혀 무너져 있을 때*, 지금을 떠올리며 조금 더 살게 될 것 같다고. 절대 죽지 않을 것 같다고. (p. 378-379)
읽는 동안 강하게 몰입했고, 그럴수록 아팠다. 우리가 겪는 많은 일에는 생각보다 '나'에게 원인이 없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픈 것도. 하지만 왜 우리는 자신에게 원인을 찾고, 나를 고치고 바꾸려고만 할까. 대표적으로 지수가 앓고 있는 강박증이나 섭식장애는 비교적 흔한 증상이다. 특히 우리나라 섭식장애 환자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그것도 청소년, 2-30대 여성이.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다들 사회적 시선과 압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지수가 그랬듯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외모 강박 같은 사회적 감옥.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나의 과거, 경험, 고통, 신체까지도. 형태는 모두 다를지라도 모두 자신만의 "동굴"(232면)이 있을 거라고. 내가 지수나 친구들의 감정선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한 것처럼, 나에게는 "별거 아닌 일"(244면)이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지수는 해리아가 사라지면 자신의 과거도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해리아가 자신을 알아본 순간이 "최초의 기억"(288면)이고, 그것이 사라지면 자신은 "새것"(292면)이 될 거라고. 하지만 해리아가 죽는다고 하여 그 과거가 사라질까? 해리아가 자신을 알아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는 없다. "그때 왜 죽지 않았어?"(283면)라는 지수의 물음에 해리아는 "그럼 내가 죽었어야 해?"(283면)라고 답한다. 해리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암흑 같은 동굴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조금은 사이비 같고, 의심스럽기도 한 채수회관에서, 또 에필로그의 짧은 기록에서 치유의 빛을 희미하게나마 확인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수의 어떤 선택은 의문으로 남지만.) 포기하지 않고 같이 밥을 먹고,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는 것. 어떻게 그렇게 힘든 순간을 혼자 버텼니 어루만져 주는 일. 아픈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낡은 외투를 꺼내 단단히 껴입"(232면)으면서. 우리가 언젠가 모두 헤어지게 되더라도 함께 했던 순간의 기억은 우리를 무너지지 않도록, 나아가 조금 더 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우리가 그렇게 "잘"(286면) 살아갔으면 한다. 과거와 고통을 마주하고, 서로가 각자의 고통으로 아프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가 "계속 살아 있을"(379면) 거라고.
오늘은 글이 자꾸 길어져서 한 권만. 원래는 작가님 다른 책이랑 같이 쓰려고 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게다가 요즘 필사랑 독서 기록이 늦어져서 의도치 않게 이 책에 관해 거의 일주일 동안(!) 생각하고 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문장이 다가오는 깊이가 달라진다. 요즘에는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읽고 싶은 마음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