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환희의 송가'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서양음악사를 넘어 인류 문화 전체에 깊은 발자취를 남긴 작곡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로 이어진 고전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개인의 내면과 인간의 자유, 고뇌와 환희를 음악 속에 담아내며 낭만주의로 가는 다리를 놓았습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스물한 살, 베토벤은 본에서 비엔나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유럽 음악의 중심지에서 야심차게 활동을 시작한 그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점차 청력을 잃게 된 것이었습니다. 1790년대 말부터 나빠지기 시작한 청력은 1801년 무렵에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뭉개져 들리고 높은 음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1802년 가을, 베토벤은 비엔나 교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형제에게 남기는 긴 편지를 씁니다. 절망, 죽음의 유혹 그리고 “예술이 나를 붙잡아 세상에 남아 있게 했다”는 결의가 동시에 담긴 문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입니다. 이 편지는 생전에는 공개되지 않았고 1827년, 그의 사후 유품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죽음을 향한 갈망과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소명과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고백한 이 글은 단순한 유서가 아니라 고백문에 더 가깝습니다. 베토벤은 이 글을 통해 고난과 절망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끝내 충실히 살아가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쓰는 순간이야말로 그가 다시금 삶을 붙잡고 위대한 음악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편지 이후 베토벤의 ‘영웅시대(Heroic age)’로 불리는 시기가 시작됩니다. 베토벤은 곧바로 교향곡 3번 ‘영웅(Eroica)’에 착수하여 규모, 형식, 서사에서 전례 없는 확장을 보여줍니다.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 사중주 등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대표작 대부분이 이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청력을 상실한 이후 그가 의지한 것은 바깥 귀가 아니라 머릿속의 귀였습니다. 악상 스케치와 초고, 끝없는 수정을 통해 소리를 상상하여 들으며 작곡을 이어나갔고 일상적인 소통은 1819년경부터는 대화 노트에 의존했습니다. 또한 당대의 보청 도구였던 이어 트럼펫 ear trumpet과 여러 보조장치를 실험적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1824년 5월 7일, 비엔나. 그는 거의 완전한 농인이었지만 무대에 올라 자신의 마지막 완성 교향곡 9번을 세상에 들려주었습니다. 교향곡이라는 장르가 본래 오케스트라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작품에 합창과 독창이 더해진 것은 정말 파격적이자 혁신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교향곡 속에서 목소리를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이미 오랫동안 가슴속에서 울려오던 시인의 언어와 인간에 대한 찬가를 음악 속에 담고자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환희에 부쳐(An die Freude, Ode to Joy)'는 인간이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자유와 평화를 함께 노래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된다”라는 합창의 외침은 국적도, 계급도, 시대도 넘어 지금까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후 이 멜로디는 유럽연합의 공식가로 채택되어 ‘자유·평화·연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곡을 들을 때 단순히 장엄한 선율만이 아니라 베토벤이 세상에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 -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과 인간애 - 를 함께 느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