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폴란드 태생의 작곡가이다.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의 작품 중 피아노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Arthur Rubinstein은 "쇼팽은 그의 모든 인생을 피아노에 바쳤고, 우리 피아니스트들은 그를 피아노의 절대, 절대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어떤, 그 어느 작곡가보다도 훨씬 더 피아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He devoted all his life to the piano. So we pianists consider him as our supreme, supreme God of the piano. He has much more to do with the piano than any, any other composer."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하였다.
피아니스트라면 절대로 피해 갈 수 없는 작곡가가 쇼팽이고 물론 그 누구도 피하고 싶지도 않을 거라 생각한다. 모두 각자의 취향이 있기 마련이지만 쇼팽에 있어서만큼은 나를 비롯한 그 어떤 피아니스트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피아노라는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쇼팽에게서 나온다. 나는 처음 '도레미'를 배우는 어린이부터 예중, 예고, 음대를 꿈꾸는 전공생과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피아노를 취미로 배우는 어른까지 다양한 분류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특이한 선생님인데 (보통은 각자 자기가 가르치는 분류의 학생이 정해져 있다) 모든 학생이 연주하고 싶어 하는 작곡가는 쇼팽이다. 어린이들은 쇼팽의 에튀드 '흑건'을 연주해 주면 눈이 동그래지고 전공생들과는 에튀드, 발라드, 스케르쵸, 소나타에 협주곡까지 쇼팽의 모든 곡을 다뤄야 하고 어른들은 '녹턴'을 연주해 드리면 눈물을 비치시곤 한다.
쇼팽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곡은 아무래도 '즉흥환상곡'일 것이다.
문제는 아주 유명한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기가 꽤 어렵다는 사실이다. 물론 전공을 한 피아니스트에게는 난이도가 높지 않은데 취미로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에게는 한 박자에 왼손은 3개를 오른손은 4개를 연주해야 하는 폴리리듬이 넘기 힘든 허들이 된다.
피아노는 다성부 악기이기에 이런 폴리리듬이 종종 등장하는데 양손이 서로 다른 박자를 각자 고르게 연주하는 것은 상당한 테크닉을 요한다. 어렸을 때부터 양손을 각각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훈련을 한 피아니스트의 경우 아무리 복잡한 폴리리듬도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자꾸 동기화되려는 양손을 떼어놓기가 쉽지 않다. 나는 학생에게 "오른쪽 귀로 오른손만 듣고, 왼쪽 귀로는 왼손만 들으세요."라는 황당무계한 충고를 늘어놓거나 "서로를 무시하고 각자 갈길만 가세요."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 리듬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메트로놈을 켜고 양손 따로 정확한 리듬을 익힐 때까지 연습하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양손을 따로 연습해도 붙여놓으면 다시 서로를 따라가려는 이 친구들을 어찌할꼬. ㅎㅎ
무라카미 하루키는 나의 20대를 함께 보낸 작가였다. 물론 그 후에 나온 신작들도 빼놓지 않고 읽었지만 저 때의 나에게 하루키는 동경하는 작가이자 문장 하나로 나를 울리고 그가 펼쳐놓는 관념과 상상의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서 만난 친구 같았다. 그의 작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장편 소설에 보면 '계산사'라는 직업을 가진 주인공이 바지 양쪽 주머니에 들어있는 다양한 단위의 동전을 손으로 세어 우뇌와 좌뇌를 나눠 따로 계산하여 총합을 내는 장면이 나온다. 예를 들어 오른쪽에 50엔이 3개 있고 왼쪽에는 50엔이 2개 이렇게 계산하는 게 아니라 오른쪽 주머니, 왼쪽 주머니의 동전을 단위당 통합하지 않고 각자의 합을 내고 그 후에 합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피아니스트들이 폴리리듬을 연주할 때를 떠올렸다. 오른손은 오른손대로, 왼손은 왼손대로 정확한 리듬을 연주하며 귀로 소리를 듣고 뇌는 그것을 통합하여 자연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실제로 어릴 때부터 악기 연주를 훈련한 음악가의 뇌를 조사한 결과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신경다발(뇌량)이 보통사람보다 두껍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일부에서는 애초에 뇌량이 두껍게 태어나서 연주자가 되었다는 운명론적 이야기를 하는 연구자들이 있었으나 2008년 하버드 의대에서 6세부터 9세까지 3년에 걸쳐 어린이를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주당 2.5시간 이상 악기를 연습하게 하고 한 그룹은 2시간 이하로 악기를 연습하거나 아예 하지 않도록 하였다. 결과는 주당 2.5시간 이상 악기를 연습한 아이들의 경우 뇌량의 굵기가 25% 이상 두꺼워졌으며 컴퓨터 타자와 같은 다른 과제에서도 두 번째 그룹보다 우수하였다. 결론적으로 어린이의 악기 연주 훈련은 뇌량을 증가시켜 두 손의 움직임을 더 잘 계획, 연결, 조정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의 뇌는 가소성(可塑性)을 가진다. 기존에는 뇌가 성장을 다하면 뉴런 등의 뇌세포가 그대로 안정화한다고 하였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학습이나 여러 환경에 따라 뇌세포는 계속 성장하거나 쇠퇴한다. 즉,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뇌량이 두꺼워지는 속도는 어린이와 차이가 있을지언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주 성실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원고지 20매가량의 글을 쓰고 오전 10시가 되면 10km를 달리고 한 시간 수영을 하고 오후 2시부터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산보를 하거나 중고 음반가게에 다녀온다. 귀갓길에 장을 보고 오페라를 들으며 맥주나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소박한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도 규칙적인 일상을 보내는데 20대의 나는 그 루틴을 철저히 지켜나가는 주인공들이 너무 좋았다. 미래를 알 수 없고 불안정한 시절에 그 어떤 상실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있는 주인공들의 곧은 의지가 좋았다.
우리도 뇌의 가소성을 믿고 굳은 의지를 가지고 매일매일 정진하다 보면 누군가는 <즉흥환상곡>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마라톤을 완주할 것이고, 누군가는 브런치의 오늘의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