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풀어보는 드레스 이야기
오늘은 뜬금없이 연주자의 드레스에 대해서 얘기해보려고 합니다. 갑자기 그냥 그러고 싶네요. ㅎㅎ
먼저 연주자들이 연주를 준비할 때의 순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연주의 콘셉트를 정한다. 무엇을 위한 연주인가? 주제는? 관객층은 어떻게 될 것인가?
2. 곡 리스트를 정한다. 주제에 적합한가? 연주했던 경험이 있는 레퍼토리인가? 이 연주를 들으러 올 것으로 예상되는 주 관객층이 듣기에 적당한 난이도와 길이인가?
3. 연주 장소와 날짜를 확보한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과 같이 개인 대관이 불가능한 곳은 기획사를 통해 대관서류를 제출하고 개인이 대관이 가능한 곳은 직접 대관서류를 보낸다.
4. 대관에 성공해서 날짜가 잡히면 연습을 한다! 끝없이 연습을 한다! 아무리 해도 부족할 것이 자명하므로 가능한 모든 시간을 연습에 투자한다!
5. 연주 적어도 4주 전까지는 포스터와 프로그램 리플릿을 완성해야 한다. 필요한 사진을 준비해야 한다. 이때 처음 드레스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연주할 때 입을 드레스를 미리 준비해서 입고 사진을 찍을까?!
6. 5번에서 드레스를 준비하지 않았을 경우 연주 2주 전부터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다.
뭐 입지??
드레스를 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악기가 무엇인가' 일 것입니다. 거의 모든 악기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조건은 '팔의 움직임이 편안할 것' 이겠지요.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플루트... 모두 다 팔의 움직임이 불편하면 연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주로 소매가 없는 드레스를 입고 소매가 있는 경우는 움직임이 편하게 소매가 벌어지거나 통이 넓은 것을 선택합니다. 이 공통조건에 추가로 악기마다 독특한 조건이 붙게 됩니다. 예를 들어 첼리스트는 다리를 넓게 벌리고 의자에 앉아야 하기 때문에 치마의 통이 넓고 길이가 길어야 하며 바이올리니스트는 악기를 올려두는 쇄골 주변에 장식이 있는 드레스는 피해야 합니다.
피아니스트는 팔의 움직임만 편하면 딱히 제한은 없습니다. ㅎㅎ 그래서 유자 왕 Yuja Wang 같은 피아니스트는 초미니스커트에 킬힐을 신고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이런 의상을 입고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는 최초였기에 뛰어난 연주실력과 함께 많이 주목을 받았고 피아니스트 유자 왕은 여전히 미니스커트 + 킬힐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슈빌리 Khatia Buniatishvili는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피아니스트로 역시 유자 왕처럼 그 외모가 연주자로 주목을 받는데 도움이 된 케이스입니다.
카티아 부니아티슈빌리는 주로 육감적 몸매를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고 중단발 길이의 구불거리는 헤어스타일을 고수합니다. 이 두 연주자 모두 분명 외모가 주목을 받는데 도움이 되었겠지만 연주실력 또한 아주 탁월해서 가끔은 외모를 이유로 실력을 폄훼하는 평가를 보면 속이 상합니다. 조금은 뜨거운 감자 같지만 저는 이것이 여성과 남성에게 들이대는 이중잣대라고 생각하는데요.
클래식 지휘계의 아이돌 클라우스 메켈레 klaus mäkelä입니다. 물론 위의 두 피아니스트처럼 의상이 화려한 것은 아니지만 정장의 틀 안에서 많은 변주를 주었습니다. 블랙진 바지와 블랙셔츠로 캐주얼함을 살리면서 뿔테 안경과 하얀 행커칩으로 젠틀함을 놓치지 않고 있지요. 누가 봐도 잘생기고 젊은 지휘자입니다. 그는 지휘자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더블버튼의 슈트도 자주 입고 뒤로 쫙 넘긴 헤어스타일을 주로 합니다. 그를 두고 부족한 실력인데 외모로 주목받으려고 한다는 평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나이도 어린데 (1996년생) 실력은 엄청나고 거기다 잘생겼어!"라고 말하죠.
두 명의 여성 피아니스트와 남성 지휘자는 모두 자신을 브랜딩 하는데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외모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남들과 차별화되는 장점이 있다면 드러내는 것이 정답 아닐까요? 유자 왕에 대한 기사의 헤드라인을 한번 보겠습니다.
이번엔 클라우스 메켈레를 다룬 기사의 헤드라인을 봅시다.
이중잣대가 보이시나요? 음악가로서 인정받는데 남성 지휘자에게는 외모가 플러스가 되고 여성 피아니스트에게는 마이너스가 되고 있지요. 심지어 같이 연주를 하는 지휘자가 노파심에 그녀의 외모만 보지 말라고 인터뷰를 할 정도라니요. 물론 유자 왕이나 카티아 부니아티슈빌리의 의상이 훨씬 더 화려하고 파격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화려한 외모는 그들을 폄훼하는 데 사용되고 190cm의 훤칠한 키에 긴 팔로 시원하게 지휘를 하는 그는 칭송받는 것이 조금은 화가 나려고 하였으나......
여러분, 승자는 유자 왕(1987년생)입니다. 왜냐면 그녀는 9세 연하 남자 친구 클라우스 메켈레(1996년생)가 있으니까요.

네, 둘은 연인사이입니다. 유자 왕, You Win!!
그럼 저는 어떤 드레스를 입을까요?
저는 몇 개를 두고 돌려 입습니다.

1. 2013년 첫째가 뱃속에 있어 흡! 하고 숨을 들이마신 뒤 찍었습니다. 포스터를 만들기 위해 프로필 사진을 여름에 먼저 찍었고 임신 4개월 정도라 별로 티가 많이 나지 않았지요. 정작 연주회는 11월이었고 배는 8개월 만삭에 가까웠지만 가슴아래로 넓게 퍼지는 엠파이어 드레스라 다행히 입을 수 있었습니다.
2. 2012년 9월 소아암 환우를 기부음악회 사진입니다. 기부금이 얼마가 모였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글을 쓰느라 예전 사진첩을 둘러보다 역동적인 장면이기에 넣어봤습니다. ㅎㅎ
3. 2024년 1월 기부음악회 사진입니다. 저 연주회로 246만 원을 모아 초록우산재단에 기부하였습니다.
이 빨간 드레스는 저와 함께한 13년의 세월 동안 적어도 10번 이상 무대에 올라갔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몇 개의 드레스 중에 가장 많이 무대에 올라갔지요. 검은 피아노와 빨간색이 잘 어울리기도 하고 체형의 변화와 상관없이 입을 수 있어 좋아하는 드레스입니다. ^^
뜬금없는 드레스 이야기 재밌으셨나요? 다음에는 또 다른 뜬금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설 연휴의 시작입니다. 모두 안전하게 따뜻한 고향의 품에 안겼다 오시길 바라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inen guten Rutsch ins neue Jahr!*
*새해로 잘 미끄러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