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서울, 아버지는 고무신을...
[아버지 05] 20세기 말, 고무신을 신는 내 아버지
시골이 아닌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그리고 그중에서도 출, 퇴근 시간에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환승역인 건대입구 근처에서 운동복 바지에 고무신을 신은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니 20세기 말 2000년 밀레니엄이 다되어 가는 시점에 시골에서 그것도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도 아닌 소규모 회사의 대표라는 사람의 출근 복장이 볼품없는 운동복 바지과 맨발에 고무신이라니. 최근에는 보면 승려, 즉 스님들도 외출하시고 시내를 다니실 때엔 고무신이 아닌 운동화 신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가 가출 후 집으로 돌아오시고 함께 살게 된 내 중학교 시절부터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다. 어머니는 검은색 비닐봉지에 흰 고무신을 사 오신 아버지를 보고는 장식할 것도 아닌데 갑자기 고무신은 왜 사 왔냐고 물어보시니 아버지는 이 것 보다 편한 신발은 없다며 이제는 고무신을 신고 다니겠다고 하시자 정색을 하시며 제발 체면 좀 생각하고 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현대 시대에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대한민국에서 타인이 고무신을 신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보실 수 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체면이라는 것과 사회생활에서 타인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이 있기에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는 그 새벽 힘든 아침에도 일어나 불편한 정장과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며 머리를 단정히 정리하고 사회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는 소규모 회사의 대표이자 6명 정도의 직원을 두셨고, 우리 집에서는 가족을 대표하는 가장이셨다. 이런 아버지의 출근 및 생활복장은 흰 와이셔츠에 끝까지 올리지 않고 풀어헤친 넥타이, 브랜드 없는 볼품없던 운동복과 맨발 위에 신은 흰 고무신이었다. 출근, 가족들과의 외출, 명절 그 어디를 가더라도 아버지의 평상복은 딱 이러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말끔한 정장과 구두를 사주셨음에도 명절 당일 차례상 앞, 장례식, 결혼식 등 꼭 정장을 입어야 하는 날이 아니면 장롱에서 정장을 꺼내시는 적이 없었다. 겨울에는 어머니가 백화점에 가서 비싼 정장, 멋진 코트를 사 와서 제발 입고 다니라고 난리 치셔도 공사 현장에서 현장사무소 일 하시는 분들이 입으시는 현장 점퍼 같은 것만 입고 다니셨다. 아버지는 타인에게 비추어지는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었다. 고무신을 신고 있어도 당당한 분이셨고, 내가 당당하면 됐지 사람들 눈에 비치는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며 자신은 이 고무신이 너무 편하고 시원하다는 이유로 출근과 가족 외출 등 어디를 가던지 항상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었다.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엔 아무렇지 않을 수 있고 특별히 불편을 주는 복장은 아니기에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함께 다니는 우리 가족 입장에서는 부끄러운 순간들이 많았다. 단순히 고무신이라는 것이 그 당시에 사람들이 흔하게 신고 다니는 신발도 아니었으며 위에 함께 입은 옷들 또한 깔끔하지 않아서 아버지와 함께 다니다가 아는 분들을 만나서 인사하며 아버지를 소개할 때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보통 회사원들이 입는 평범한 정장에 구두만 신어도 될 것을 그 구두와 정장은 너무나 불편하다며 어머니의 만류에도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아버지셨다.
아버지가 당시 입고 다니셨던 패션을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위에 상의는 와이셔츠를 입으시고 넥타이를 하시지만 제대로 끝까지 올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퇴근하고 회식 끝난 뒤 많이 풀어 내린 식의 넥타이를 하신다. 늘 풀어헤친 넥타이를 볼 때마다 왜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안 하느니만 못한 넥타이를 와이셔츠에 늘 이렇게 하셨고 하의는 브랜드 없는 운동복 바지를 입으셨다. 초고도 비만의 복부라서 맞는 바지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늘 운동복 바지를 입으셨다. 와이셔츠에 운동복을 개그 프로그램이 아닌 일반 삶의 현장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몇 분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양말은 신지 않으시고 흰색 고무신을 신으신다. 이렇게 입고 다니시는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괜히 내가 부끄러워서 아버지께 말씀은 드린 적 없지만 속으로 제발 저렇게 입고 다니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중학교 2학년 여름, 당시에 다니던 교회에서 재정이 없다며 교회 옆에 있는 중학교 운동장을 빌려 텐트를 치고 수련회를 했었다. 재정이 없다는 이유로 저녁 식사까지 학생들 부모님들이 준비해오게 했었는데 아이들이 먹을 저녁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 부모님이 교회로 찾아오셨다. 어머니는 교회에서 교사로 봉사를 하고 계셨으며 당연히 집에 잠시 들러 저녁 반찬들을 잔뜩 준비해서 아버지와 오셨다. 나는 어머니가 집에 잠시 저녁을 가지러 가신 사이에 교회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늘 자주 보던 모습의 아버지였다. 주말이라 위에 와이셔츠는 입지 않으셨는데 그 마저도 깨끗한 옷은 아닌 역시나 정체를 알 수 없는 티셔츠에 고무신을 신고 오셨다. 교회가 강남 한복판에 있어 당시의 친구들은 강남에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아이들이었고 이 날 오신 부모님들을 보니 대부분 멋지고 깔끔한 기품이 있어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아니 사실 일부러 멋을 낸 것도 아닌 그들은 그저 평범한 일상에서 입는 옷을 깔끔하고 정돈되게 입고 오셨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런 부모님들 사이에서 저 멀리 다가오는 내 아버지의 모습은 이 날 더욱 충격적이었다. 아이들에게 내 아버지라고 소개하기가 부끄러워서 순간 자리를 박차고 다른 곳으로 얼른 도망을 가버렸다. 그리고는 잠시 혼자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리에 오는데 평범한 운동화 조차 신을 수는 없었던 것인가, 본인의 아내와 아들의 입장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무리 본인의 편안함이 최우선이라고 하지만 타인들과 함께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서 저 복장이 지금 타당한 복장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인가 서운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이내 분노까지는 아니지만 아버지의 모습에 화가 났다. 정말 대체하여 입을 옷이 없고, 옷을 살 돈도 없었으면 이해라도 할 텐데. 그렇게 운동장에 설치한 텐트들 뒤에 숨어 아버지가 찾아오지 않고 넘어가길 기다렸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흘렀는데 사람들이 운동장으로 오기 시작하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며 내심 속으로 계속 아버지가 날 발견하지 못하고 넘어갔으면 했지만 결국 아버지는 나를 발견하고는 아빠가 왔는데 왜 인사도 안 하냐며 나무라셨다. 친구들과 있는 그 상황에서 친구들은 아버지께 인사를 드렸고, 아버지가 그 자리를 떠나신 후 친구들 중 한 명이 놀리는 것도 아니었고 정말 단순하게 아무런 의미 없이 "너네 아버지는 고무신을 신으시네?"라고 물었다. 나는 "어.. 저게 무척 편하시다고 쉬는 날엔 가끔 고무신을 신고 다니곤 하셔 하하하" 웃으며 대답해주고는 괜히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서 자리를 피했다. 친구들 눈에도 고무신이 들어왔었나 보다. 그리고 다음 날 수련회가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있는데 현관문에 아버지 고무신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화가 나서 그 고무신 하나를 집고선 문에 던졌다.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이 나를 봐주고 내가 고무신 싫어하는 것을 아버지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던진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 고무신이 너무나도 꼴도 보기 싫어서 그렇게 화풀이를 했다.
나 역시 이제 성인이 되었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어느 순간은 아내의 남편으로 타인의 앞에 서야 할 때가 있고, 또 다른 순간은 딸아이의 아버지로 타인 앞에 서야 할 때가 있다. 운동할 때 입는 기능성 티셔츠와 팬츠, 그리고 악어 로고가 있는 크ㅇ 슬리퍼를 신고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복장인데 이렇게 복장을 하고는 그 누구도 만나러 나가지 않는다. 그리고 나 또한 정장을 대단히 불편하게 생각하고 좋아하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한 것이 아니며, 일반 회사에 취업해 직장 생활을 하며 살아온 것도 아니기에 정장을 입고 생활할 일이 없었던 삶이었다. 대학교 입시 실기 시험, 전공 실기 시험, 정기 공연과 일반 클럽 공연, 가수들 세션 등등 어떠한 연주의 상황에도 정장을 꼭 입어야 하는 경우는 없었다. 청바지가 우리에게 가장 정장 같은 기성복이었다. 그래서 무대에서 장시간 서있으며 사운드 장비들을 발로 조절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두는 대단히 불편했기에 늘 예쁘고 멋진 운동화를 즐겨 신었었다. 내 신발장에 운동화가 수십 켤레 있더라도 단정히 옷을 입고 나가야 할 경우를 대비하여 제대로 된 구두 몇 켤레는 준비되어 있다. 아무리 불편하고 발이 아파도 단정하고 품격이 있어 보여야 하는 자리에서는 꼭 구두를 신는다. 나는 키가 대한민국 남자 평균 키보다 작은 편이고 머리는 크며, 이제는 제법 탈모도 시작되어 이마도 많이 넓어졌고 외가 쪽 유전으로 가느다란 다리(아내의 스키니진도 입을 수 있다), 친가 쪽 유전으로 인한 거대한 상체(운동을 하지 않아도 옷을 입으면 운동하는 사람 처럼 보일 정도) 등 정말 외모적으로 비율과 모든 면에서 어떠한 옷을 입어도 태가 나지 않는 너무 볼품없는 외모를 타고났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모습이 아내와 딸의 또 다른 얼굴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배웠기에 심지어 타인의 모습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미국에 살더라도 함께 외출을 하는 순간들과 중요한 미팅의 자리 등 필요한 순간들은 꼭 단정한 모습을 꼭 유지하려 한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우리 가족은 주말에 항상 쇼핑몰을 비롯하여 공원 등 외출을 즐겨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나는 운동화 수집의 취미가 있어서 운동화가 무척이나 많다. 그래서 딸아이와 커플 신발도 사서 신고, 딸아이의 노란 유모차에 맞춰서 노란 운동화를 신고 나가는 등 외출을 하며 외적으로 꾸미는 것이 조금은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코로나가 터지고 우리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우리 가족이 현재 미국에 사는 사람들에 비하여 조금 과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데, 우리는 지난 3월 이후로 대형 쇼핑몰에 간 적이 없다. 가끔 장을 보러 가야 해서 마트를 가는 것이 전부였고, 교회와 딸의 어린이집 등교도 계속 못가고 있으며, 신발과 옷 등은 당분간 외출 계획이 없기에 전혀 구입한 것이 없다. 또한 그 수십 켤레의 신발 들 중 3월 이후로는 보통 일 갈 때만 신는 두 켤레의 신발이 있는데 그것만 신었을 뿐 그 외에 예쁘고 아끼는 신발들은 벌써 몇 달째 손도 대지 않고 있다. 아내도 몇 가지 되지 않는 명품백들을 3월 이후로 한 번도 들지 않았으며, 아내와 딸은 주말에 장을 보러 마트에 갈 일이 아니면 외출을 할 일이 없기에 늘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만 입고 지내며 있다. 사진 찍는 취미가 있어서 코로나 전에는 늘 외출해서 사진 찍는 재미가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에는 늘 집에만 있다 보니 찍어준 아이 사진을 보면 매일 똑같은 내복에 머리는 헝클어져있고, 특히 몇 달째 집에만 있다 보니 찍히는 사진이 모두 똑같아서 이제는 사진 역시 잘 찍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의 고무신을 회상하다 이야기가 조금 다른 길로 들었는데, 외적으로 수려한 외모를 가지지 못했기에 늘 아내와 딸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나는 그래도 조금은 멋지고 든든한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고 싶었는데 내적으로도 부족하지만 외적으로는 더 많이 부족한 아버지가 되어있다. 아내는 심지어 나보다 키가 크다. 여자로서는 큰 편이라서 결혼 전에는 비슷한 줄 알았는데 결혼 후 제대로 보니까 정말 나보다 눈에 띌 정도로 크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깨동무를 할 수 없고 아내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면 그렇게 편하다고 한다. 미국 남자들은 심지어 할아버지들도 키가 상당한데 주말에 나들이 다니는 가족들을 보면 큰 아버지에, 크지만 아버지보다는 작은 어머니와 자식들이 다니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이상적인 가족들의 뒷모습이다. 그런데 우리가족은 이런 보통의 그림과는 다르게 나는 아내보다 작고 그렇지만 몸의 비율도 별로라서 뒤에서 보면 아내가 제일 크고 그 다음에 나와 딸아이 이건 동화책에도 나오지 않는 그림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내가 이렇게 예쁜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고, 한정판 운동화를 신고 나가봤자 뒤에서 보이는 우리 가족 모습은 나로 인해 볼품없을까봐 모든 게 싫어지고 짜증이 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 그래도 저 사람이 노력은 했구나, 자신을 어느정도 꾸미려고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자괴감이 들어도 나는 이렇게 노력한다. 아버지 당신이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다른 사람들 모두 신는 그 평범한 운동화나 구두에 조금은 깨끗한 옷만 입고 오셨어도 내가 도망을 갈 일은 없었는데 늘 안타깝습니다.
후기
아래의 글 들 중 소개되었던 미국에서 아버지를 만났던 이야기. 그 이야기 중 내가 아버지를 공항에 마중 나간 일이 있는데, 그 날은 아버지를 아주 오랜만에 그것도 미국에서 만나는 날이라 들떠있었고 그 들뜬 마음으로 공항 대기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있었다. 아버지가 딱 나오셨는데 그 날 아버지의 복장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역시나 즐겨 입으시는 흰색 와이셔츠에 다 풀려버린 넥타이, 기름에 절어있는 헝클어진 머리, 배가 너무 나와서 와이셔츠 하단 쪽 단추는 풀려있었고, 와이셔츠 하단은 모두 바지 위로 나와있었으며 벨트가 풀린 걸 모르셨던 건지 바지는 너무 흘러내려 바지를 내리는 변태라고 착각이 정도였다. 나는 순간 홈리스인 줄 착각이 들었다.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할 정도로 너무나 추한 꼴이었다. 아니 이런 모습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신 건가. 아니 비행기에서 잠시 불편할 수는 있는데 한국에서 온신 것도 아니고 뉴욕에 계시다가 오신 건데 그 3시간 좀 넘는 비행시간이 얼마나 힘드셨다고 이 꼴로 오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온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공항 한복판에서... 그런데 역시나 타인을 신경 쓰지 않으시는 아버지와, 타인이 어떠한 행색을 했던지 신경 쓰지 않는 미국이라 그런지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빨리 옷 좀 정리하고 입으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비행기가 불편해서 그러셨다고 그 사람들이 넘쳐나는 대기실에서 바지를 주섬주섬 다시 입으셨다. 내 아버지는 여전하셨었다. 평생 모든 부분에서 한결 같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