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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망했어...

[아버지 06] 6년간 모은 모든 것을 3년 만에 탕진

by Fensoner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망했어..."


어머니는 냉동고 안을 닦으시며 나에게 저렇게 말씀하시고는 한참을 우셨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도저히 알지 못했다. 이사를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망했다니?


아버지라는 암세포는 3년 전 아버지가 집으로 다시 돌아온 뒤 천천히 우리 가족의 몸으로 퍼져 이내 우리 가족을 죽어가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짧지만 행복하고 편안했던 우리 가족의 9년 삶은 그렇게 끝이 나고 처절한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것도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닌 사리 분별을 할 수 있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된 나이에서...



무엇이, 어디서 부터 잘 못된 것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가 망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된 상황이길래 어머니가 저렇게 우시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는 것인가. 조금씩 어려워지는 상황도 아니었고 며칠 전부터 이사를 간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어머니는 집을 보러 다니셨는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망했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어머니는 식탁에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으로 넋을 놓으시고는 내 이름을 부르시며 이사를 가야 하는데 우리 짐들을 놓을 공간이 없다고 하셨다. 거실도 없고 방도 2개뿐인데 너무 작아서 어떻게 정리를 하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셨으며, 더 이상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 수도 없어 두 분이 사실 공간도 다시 알아봐야 한다고 하셨다. 막내 외삼촌은 몇 달 전 결혼을 하고는 출가해서 살 던 상황이었다.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어머니는 울음을 멈춘 적이 없으셨다. 외할머니는 웬만한 것들은 버리라며 말씀하셨고 어머니는 계속 올라오는 속상함과 좌절감에 소리를 지르며 "내가 산 것들이 야, 내가 힘들게 벌어서 산 것들이야 모두 버리지 마"라며 그 어떤 것도 쉽게 버리지 못하셨다. 이삿짐으로 모두가 정신없었기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경황도 없었고 어머니는 짧게 아빠 때문에 망했다고 말씀만 하셨을 뿐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매일 우시며 지내셨던 그때 며칠간의 어머니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아직도 선명하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비록 전세였지만 다세대 주택에서 1층과 지하 1층 두 곳을 전세로 살만큼 여윳돈이 어머니께 있었고, 망해서 이사를 나가기 전까지 이 집에서 3년 조금 넘게 살았다. 어머니가 이 집으로 전세 이사를 왔는지 어려서 몰랐지만 나름 어머니는 계획이 있으셨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중학교 1학년이 되고 초여름이 시작되던 어느 날 내 방에 어머니가 들어오셔서는 할 말이 있으셨다고 했다. 그렇게 환하게 웃으시는 어머니 얼굴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괜한 기대까지 되었었다.


"우리 아파트 당첨됐어. 우리 이사 간다 한강 보이는 아파트야!"


어렸기에 아파트 당첨이 무슨 말인지를 몰랐다. 아파트를 샀다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여쭤보니 청약 넣은 것에 당첨이 되었고 앞으로 납입금 입금하며 준비하면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가 우리 집이 되어 거기서 살게 될 거라는 말씀이셨다. 한강이 보이는 것이 왜 좋은지, 중요한지는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그냥 아파트가 생기고 아파트에 살게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당시에는 전세, 월세 이런 개념도 몰랐던 시기라서 우리 집이 무슨 말이지도 몰랐다. 나는 그냥 살고 있는 집이 우리 집인 줄 알았다. 우리가 당첨된 아파트는 역 이름이 기억 안 나는데 7호선 건대입구 다음 역쯤에 있는 한강변에 있는 아파트였다. 이후 우리가 망해서 어려워진 뒤에 7호선이 완공되고 가끔 그곳을 지나며 어머니는 저 집이 우리 집이었을 텐데 하며 눈물을 보이시곤 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마음이 힘들어질 준비도 할 여유없이 우리는 이사 준비를 마치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는 이사를 가기 전 우리에게 어떤 집으로 가는지 먼저 보여주시지도 않아 어머니의 말씀만 듣고 작겠구나라며 상상만 해보았을 뿐 얼마나 작을지는 감이 오질 않았다. 이사 당일 새 집에 도착하여 보니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모든 집들 중에서 가장 작은 집이었다. 회색 철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 전에 살던 집에선 작아 보였던 냉장고가 왜 그렇게 커 보이고 집을 답답하게 만드는지 그 집이 주는 답답함에 숨 조차 쉬기 어려웠다. 이사로 인해 아직은 이 답답해진 현실을 마주할 여유 조차 없었다. 안방의 용도로 만들어진 그나마 조금 큰 방은 나와 동생이 사용하기로 했고, 작은 방을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용하시기로 했다. 그렇게 저녁을 먹고는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셔서 내 침대에 누우시고는 말없이 한참을 계시다 이내 말을 건네셨다. 그 첫마디가


"미안해..."


나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단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들이었기에 도대체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었던 것인지, 어머니는 왜 저렇게 매일을 울면서 지내시는지 알아야 현실을 조금이나마 인지하고 마음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를 진정시켜드리고 다시 여쭤보았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는지를.


답은 의외로 너무나 간단했다. 나는 우리가 사기를 당했거나, 잘 모르지만 많이 들어본 주식 투자로 돈을 날렸거나 등등 우리가 피해자가 돼서 우리가 망하게 된 것이라고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그동안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어머니께 제대로 생활비를 가져다준 적이 없었으며, 회사를 운영한 것도 그동안 모두 어머니 돈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동안 큰 집으로 이사 간다며 보여주었던 집들도 모두 허구였고, 그 집들 산다고 가져간 돈도 모두 어디 갔는지 모르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3년 동안 어머니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여 남은 게 없게 된 것이었다. 전세 계약이 만료되어 이사를 가야 하는 시점이 왔고, 아버지께 얘기했지만 다양한 핑계들과 함께 모두 잘 될거라고 안심만 시켜놓고 지내다가 결국 이 지경까지 온 것이었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실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 멍청하고 바보가 아니고서야 3년 동안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어머니는 정말 어리석으셨다. 한 번 더 믿어보자, 믿어보자 하시다가 결국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 죽게 된 순간에서야 늦었다고 인식을 하셨다. 어머니께 한강 보이는 그 이사 가기로 했던 아파트는 어떻게 되었냐고 여쭤보았다. 아버지 때문에 납입을 끝까지 하지 못해 이미 끝났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우시며 다시 잘 될 거고 해결될 거란 아버지의 그 거짓말을 계속 믿으며 그래도 아빠를 위해 기도 하자고 하셨다.


돈 걱정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는데, 해보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보고 살았던 나였는데, 그리고 내가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서야 그런 것들을 조금씩 인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우리 집은 망해서 돈이 없다니. 그렇게 시작된 고생의 삶은 드라마에서 보던 빨간 압류 딱지를 보고, 채무자들이 찾아와 괴롭히거나 하는 삶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업 실패를 한 것은 아니었고 원래 잘 나가던 사업가도 아니었고 본인의 허세를 위해서 어머니 돈을 가져다가 계속 돈을 탕진하며 그렇게 있는 돈을 까먹고 살던 삶이었기에 단순히 이제는 더 이상 까먹을 돈이 없어지자 이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럼 그 회사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으며, 직원들과 어떠한 일을 했는가. 그것도 모르겠다. 개인 사생활 노출의 위험을 생각해 더 깊이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회사는 도대체 어떠한 일을 하고(아버지 회사가 어떠한 일을 하는지는 얇게 알았지만 어떻게 수익을 내는지는 몰랐다), 무엇으로 이익을 창출하며, 그 많은 직원들은 어떠한 일을 하며 운영이 되었던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 아버지가 성공할 수 있는 그릇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3년 간의 삶을 내가 본 것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 그는 절약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돈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돈을 얼마큼 함부로, 아낌없이 쓰며 살았는지 보자면 내 아버지는 내가 상위 언급한 시절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5년의 시간 동안 지하철 혹은 버스 등의 대중교통 이용하신 적이 없다. 지금까지도 아무리 돈이 없어도 무조건 택시를 타고 다녀야 하는 분이다. 심지어 우리가 새 차를 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월급까지 지불하면서 기사를 두고는 어머니의 차를 가지고 다니시곤 했다. 심장질환으로 심장 혈관을 넓혀주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며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기셨지만 술과 담배를 끊으신 적이 없고, 심지어 시도조차 해보신 적이 없다. 돈이 아무리 없어도 담배와 술은 항상 하셨다. 택시 탈 돈으로 면허를 취득하고 차를 사서 타고 다니라 해도 편한 택시를 두고 왜 내가 운전을 하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셨던 분이다. 아마 지금까지 택시 비용만 모았어도 유명 수입차 한 대는 사고도 돈이 남았을 것 같다.


2. 게으르다. 나태하다.


아버지의 회사에 가끔 놀러 가면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한 가지 일은 아버지 회사 근처에 내 중학교가 있었어서 접근하기가 용이했다. 그래서 맛있는 것 사달라고 할 겸 연락 없이 잠깐 방문했는데 아버지가 모르는 분들과 카드를 치고 계셨다. 회사에서 그것도 대 낮에 직원들이 있는 상황에서 현금이 오고 가며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나중에 어머니께 이야기를 했다가 난리가 났었다. 어떤 날은 가면 바둑을 하고 계셨고, 기원에 가셨다고 하고, 몇 번 되지 않지만 그렇게 방문해서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가끔 주말에 집에 계시면 식사 하시고 티비를 보시다가 한 번도 빠짐없이 조는 모습을 보이시곤 이내 주무신다. 다시 일어나시면 티비 보시다가 식사하시고 또 주무시거나 외출하시고. 그나마 며칠 안되는 집에 계신 날에 이렇게 가족과 무엇을 같이 하자고 하신 적이 없으시다. 먹거나 아니면 졸다가 잠들거나 혹은 밖에 혼자 나가거나 이것이 그나마 집에 계실 때 보여주신 아버지 모습이다.


3. 무책임하다. 즉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아버지는 가정에 충실하신 적이 없다. 아무리 본인의 잘못으로 가정이 망했다 하더라도 가정에 충실했으면 우리와 이렇게 갈라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5년 동안 아버지는 집에 저녁 10시 전에 집에 귀가를 하신 적이 없다. 집에 일찍 귀가하여 우리와 대화를 하지도,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도 그 무엇도 집에 일찍 귀가하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함께 목욕탕을 간 적도 없고, 함께 산책을 간다거나 등산을 간다거나 아버지와 특별히 무엇을 한 기억이 없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늘 늦게 들어오시고, 자주 술에 취해 들어오시며, 생일이라고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어 주신적도 없다. 그렇게 헌신하셨던 어머니를 위해 특별한 선물을 해주신 적도 없고, 그냥 본인이 원하는 것을 충분히 하며 그 시간을 즐기고 편히 사셨던 것 같다. 가장으로서 회사 업무 마쳤으면 집으로 귀가하여 아이들과 아버지와의 관계에도 어느 정도는 시간을 내어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관찰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들어보고, 아내에게도 시간을 내어 아내와의 관계도 돈독히 해야 하는 게 가장의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단 하나도 아버지는 이 것들에 대하여 노력하는 모습조차 보이신 적이 없다.


이런 아버지에 진저리가 나고 싫었던 기억 때문일까 나는 일이 끝나고 특별한 스케줄이 있지 않는 한 반드시 집으로 빠르게 귀가 한다. 딸이 태어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사람이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러 가고싶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순간도 있지만 그 마음들 보다는 아내가 더 보고 싶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지금은 아빠를 외치며 달려와 주는 딸이 나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집으로 향하게 만든다.


4. 자기반성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 가정을 이 정도로 도륙을 해놨다면 미안하다, 사정이 이러해서 비록 이렇게 되었지만 달라진 모습으로 열심히 살아보겠다 이 정도의 모습을 보여줘도 가족들이 납득하고 함께 힘을 모을까 말까 한 상황인데 아버지는 늘 남 탓뿐이었다. 자기는 노력을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늘 누구 탓 누구 탓이라고만 하셨다. 우리에게 미안하다고 말씀을 하시기는커녕 계속된 방탕의 삶이 이어졌다. 늘 술에 취해 들이 오시고, 귀가 시간은 더 늦어져 새벽에 들어오시는지 언제 들어오시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으면 책임져야 할 함께 사는 가족들을 생각해서 나은 모습으로 굳건히 서있으려 노력해야 하는것이 지극히 정상이거늘 아버지는 자기반성은커녕 더욱 최악의 모습만 거듭할 뿐이었다. 하루는 새벽 늦게까지 술을 드시고 와서 방 안에 구토를 잔뜩 하시고는 그냥 나가셔서 어머니가 울며 모두 치우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시작된 어려움의 시작에서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허무맹랑한 말들에 속아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살기 시작했다. 앞으로 닥칠 더욱 어둡고, 차가우며, 괴로워질 현실은 상상하지도 못했으며 그저 아버지가 방법을 찾아 빠른 시일 안에 나아질 것이란 기대만을 가지고 어머니와 매일 모여 기도를 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갔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던 하루하루가 몇 달 아니 몇 주도되지 않아 더욱 이상하게 꼬여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에 살던 집주인 부부가 우리를 찾아오기 시작했고 그들은 우리 집에 찾아와선 아버지를 찾으며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어머니를 앞에 두고 우리 집에서 난리를 치며 행패 부리는 그 부부가 정말 밉고 증오스러웠다. 어떠한 일인지 아직까지도 알지 못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 아버지가 그들에게 돈과 관련된 어떤 잘못을 한 게 분명했다. 아버지가 떳떳했다면 그 들 앞에 한 번이라도 나타났을 텐데 아버지는 늘 나타나지 않으셨고 그 험한 꼴은 어머니와 우리가 모두 겪어야 했다. 아직도 그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고함을 지르며 했던 말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왜 이렇게 우리를 죽이냐 이 새ㅇ야!!!!!!"


이렇게 나아지는 상황과 희망은커녕 하루하루가 더욱 지옥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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