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어머니의 쉼 없던 4일간의 기록
[아버지 04] 명절 특집!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절 기록
중학교 입학을 하면서 입학 전 그 짧은 겨울의 시간 동안 아버지는 마침내 다시 우리와 함께 살게 되셨고 그러면서 곧 동네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4년 가까이 타고 다니신 자동차 현대 엑셀이 오래되었다며 큰 차로 바꾸자고 하셨다. 자동차를 좋아했던 나는 차를 바꾼 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고 당시 중형차 삼인방이었던 소나타 3, 뉴 프린스, 크레도스 중 고민을 하게 된다. 그렇게 특정 차량으로 차를 바꿨는데 나는 아버지가 사업으로 성공해서 아버지 돈으로 차를 바꾼 줄 알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결국 어머니 돈으로 차를 바꾼 것이었다. 소형차에서 중형차를 타니 넓고 편안하고 심지어 그 많이 하던 차멀미도 사라졌다. 이 차는 내가 23살 군입대 전까지 내가 성인이 된 후 내 차가 되어 나와 내 밴드 친구들의 발이 되어주었다. 이 차가 당시 후륜구동 차량이었어서 설 명절 당시에 가끔 눈길에서 쉽게 미끄러진 일들이 몇 번 있었는데 내가 군입대를 앞두고 어디를 잠깐 가는 동안 낮은 속도에서 우회전을 하는데 며칠 전 도로에 작업한 염화칼슘으로 차가 미끄러졌고 그렇게 사고가 나서 심한 사고가 아니었음에도 군입대와 운전할 사람도 없었고, 중고차 가격도 얼마 되지 않아 결국 그 사고로 폐차 결정을 하였다. 그렇게 공업사에서 폐차 결정을 하고 차 안에 타서 물건들을 정리하며 중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차와 함께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데 왈칵 눈물이 나서 차 안 앉아 한참을 울었다.
아버지가 집으로 다시 돌아오신 후 다시 함께 보내는 첫 추석에 어머니와 아버지, 동생과 나는 함께 다시 시골로 가서 명절을 보내게 되었다. 출발 전 날 어머니는 필요한 우리 가족들의 옷을 비롯한 짐을 모두 챙기시고 가면서 먹을 간식 등을 꼼꼼하게 준비하셨다. 아버지는 출발하는 날까지도 회사 일을 핑계로 그 어떤 준비도 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생겨 시골 할머니 댁까지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데 당시에는 충청도 청주까지 고속도로 그리고 청주부터 할머니 댁까지는 국도로 가야 해서 고속도로 정체가 없어도 3시간 40분 정도는 소요되었었다. 그런데 우리는 명절에 가는 것이라 늘 고속도로 정체는 피해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면허가 없으셨기에 당연히 운전은 어머니 몫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운전을 하시고 아버지는 옆에서 코가 헐 정도로 코를 골고 주무시며 나와 동생은 뒤에서 닌텐도 게임기와 책을 읽으며 우리만의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어머니의 고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지 생각도 못했다. 내가 운전을 하게 되고 성인이 되고 나서야 당시의 어머니가 얼마나 고되고 힘드셨을지가 생각이 들었으며 지난 그 시간들이 너무나 부끄럽고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어머니와 당시 기억들을 추억하며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곤 했다. 그 오랜 시간 운전을 하시며 중간에 힘들면 잠시 휴게소에 들러 쉬면서 어머니는 늘 우리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과 간식을 모두 사주시곤 했다. 가락국수와 돈가스로 밥을 먹고 아몬드와 버터구이 오징어, 음료수, 핫바, 통감자 등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사주시던 그 순간들은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그때는 몰랐던 우리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그 당시 차 안에서의 아버지 모습을 생각하면 욕을 한 바가지씩 퍼부어드리고 싶다. 어머니도 힘들어서 어깨와 다리가 쑤시고, 졸음도 와서 힘들어하시면 옆에서 안마나 대화를 하며 힘이 되어드리지는 못할 망정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만 듣기 일쑤에 계속 잠만 자는 등 어머니를 향한 배려는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6시간에서 7시간 정도 걸려서 새벽 가까이 되어서야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도착한 다음 날 이제 본격적인 명절 준비가 시작이 되는데, 어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할머니를 모시고 읍내 시장으로 나가셔서 장을 봐오신다. 아버지는 늦게까지 주무신다. 우리도 뭐 속 깊은 아들들은 아니었기에 어머니 도울 생각은 전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한심한 아들들이다. 어머니는 전 날 운전으로 온몸이 피곤하고 힘든 상황임에도 쉼도 없이 장을 봐오셔서 수많은 명절 음식들을 할머니와 준비하신다. 우리 집은 종손에 큰집으로 명절 당일 제사를 지내게 되면 작은집에서 많은 식구들이 오신다. 아버지가 다시 집을 나가시기 전까지 5년가량 명절을 지내면서 작은집 식구들이 명절 음식 준비를 위해 잠시라도 도와주러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꼭 큰집 명절 준비를 도와주러 와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명절 당일 제사를 지내고 작은집으로 가서 그 집에 계신 내게 촌수로 할머니뻘 되는 분들이(어머니보다 연세가 적으신) 전 날 화투를 많이 쳐서 팔이 아프다며 농담하는 모습을 보면 어머니는 이런 것이 화가 나고 이해가 안 된 다고 하셨다. 이렇게 하루 종일 우리가 흔히 아는 그 제사상에 올라갈 음식들과 제사 즉 차례를 지낸 후 작은집 식구들까지 모두를 위한 식사 준비를 하느라 어머니는 그 좁고 불편한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할머니와 명절 준비를 하셨다. 나와 동생은 철 없이 그저 동네 앞에 나가서 장난치며 놀고, 심심하면 마트 가서 간식 사 먹고 어머니가 힘드시기에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아버지는 방 안에서 계속 티비 보시고, 졸리면 주무시다가 어머니가 음식 만들었으니 맛보라고 주시면 그거 먹고 다시 주무시고, 밥때 되면 식사하시고 주방은 들여다보지도 않으셨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고 조금은 바뀐 시대상으로 내가 아버지를 바라봐서 꼴불견인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때는 이런 게 당연하다는 듯 여기는 문화가 있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배려심과 속이 깊은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이렇게 하루 종일 음식 준비와 집안 정리를 하고 늦게나마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마당으로 데리고 나와 하늘에 있는 달과 별을 함께 올려다보시곤 했다.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을 오냐오냐 받아주시는 어머니는 아니셨지만 우리를 향한 어머니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명절 동안 집에 있으면 방 안에서 움직일 생각 조차 안 하는 분이라 모든 잔 심부름은 나의 몫이었다. 물 떠 와라, 먹을 것 가져와라, 할아버지 뭐 하시나 연락해봐라, 가서 할머니 도와드려라, 이 것 좀 치워라, 아주 잔소리와 심부름시키는 소리에 귀에 딱지가 생길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왜 나만 시키냐며 짜증 한 번 냈다가는 온갖 쌍욕을 들어야 했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내 편을 들며 아버지를 나무라셨고 그렇게 어머니의 행동들이 내게는 큰 위로가 되었었다.
명절 당일 새벽 일찍부터 어머니는 할머니와 제사상 음식 준비를 하시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옷을 갖춰 입으시고 차례상 준비를 하신다. 시간이 되면 작은집에서 남자들만 차례를 지내러 오는데 아이들까지 합치면 10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차례 지내고 함께 아침을 먹고 나면 아침상 정리와 설거지 등을 어머니와 할머니 두 분이서 마치시고 남자들은 티비보고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아침상 정리가 끝나면 어머니는 옷 갈아입으시고 바로 우리 가족들 모두 차에 태우고는 작은집으로 향하신다 또 직접 운전하시고... 그렇게 작은집에 가서 차례 지내고 점심을 먹고 어머니는 택시기사처럼 우리 식구들 모두 태우고 성묘를 가신다. 작은집에 계시는 어머니보다 어린 그 할머니들은 집에 계시며 티브이 보고 쉬실 때 아버지가 운전 못하신다는 이유로 우리 모두 태워 성묘를 따라다니셔야 했다. 한 곳도 아니고 세 군데를 다녀야 했기에 그렇게 성묘가 끝나면 저녁 먹을 시간이 된다. 성묘 마치면 그렇게 집으로 돌아와 새벽부터 음식 준비에 운전에 힘드셨는데 역시나 쉬지 못하시고 바로 저녁식사 준비를 하신다. 아버지는 하루동안 다니시며 마신 술과 과식으로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주무신다. 어머니는 저녁식사 정리까지 모두 하고 나서야 잠이 드셨다. 우리는 심한 고속도로 정체를 조금이나마 피해보고자 명절 다음 날 새벽 일찍 출발하곤 했는데 어머니는 충분히 쉬지도 못하시고 그렇게 새벽 일찍 다시 일어나 짐을 챙겨 우리와 다시 서울로 향하는 차를 운전하셨다. 아버지는 새벽 일찍 출발이라 차에 타자마자 역시 차 뚜껑이 날아갈 지경으로 코를 골며 주무셨고 나와 동생 역시 막말로 처자느라 정신없었다. 쓰레기 같은 아들놈들. 아들들 키워봐야 소용없다는 말이 성인이 되어보니 이해가 된다. 새벽안개가 자욱해서 운전하기 더욱 힘듬에도 어머니는 우리를 깨우거나 하시지 않고 묵묵히 운전하시며 그 며칠간 힘들고 속으로는 천불이 나셨을 텐데 아무런 내색도 안 하셨다. 한 번이라도 이야기를 하셨으면 우리가 이렇게 뒤늦게 알지는 않았을 텐데. 말씀을 안 하셔서 몰랐다고 변명하기에 우리는 그저 너무 눈치 없고 속 깊지 않은 못난 아들들일뿐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를 향한 사랑을 계속해서 보내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한국의 명절과 미국의 명절 모두 우리는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한다. 한국의 명절에는 한국에 갈 수 없는 학기 중이었으며, 미국의 명절에는 짧은 시간 한국에 다녀 올 여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늘 명절에는 가족들이 더욱 그리웠고 지금도 한국은 추석인데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낼 가족들이 그립고 보고 싶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이야기하는 동안 웃으며 지내는 그 시간들이 그립다.
지금은 잘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이렇게 우리 어머니 같이 명절로 인해 준비로 고생하는 어머니들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남자들이 바뀌어 함께 준비하고, 함께 즐기며, 함께 나누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난 시간 우리 어머니와 같이 명절에 고생하시고 힘드셨던 한국 모든 어머님들께 못난 아들로서 죄송하다는 말씀 올리고 또 가족을 향한 그 헌신과 사랑에 깊은 감사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추석, 한국에 있는 가족들, 따뜻한 밥, 함께 웃으며 야식을 먹고 이야기하던 우리집이 그리운 날이다.
즐겁고, 안전한 명절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