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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머리유교걸 Oct 19. 2021

주인공은 따로 있다

내 마음속 우주대스타, 그대는 별!

2020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던 때,

해방촌에 있는 한 교육협동조합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다.

한 번도 글쓰기 같은 것을 본격적으로 해보지 않았지만,

키워드가 여성과 노동이었는데, 마침 준비하던 논문의 주제도 돌봄 노동과 감정노동에 관한 것이었다. (논문은 아직 쓰지 못했다는 것은 논외로 둔다...) 그래서 '글쓰기의 기초를 닦아 볼까..?'를 핑계 삼아 딴짓이 필요했다.


글쓰기 모임의 첫인상은 참여하신 분들의 연령대가 생각보다 높다는 것.

40~50대 '언니'들과 함께하는 글쓰기 모임은 언니들의 다양한 노동 이야기를 듣는 것이 너무 흥미로웠다.

방송 모니터링 일을 하는 언니, 학교 급식실에서 일을 했던 언니, 수학선생님인 언니, 배우인 언니, 숲 해설사 언니, 회사원 언니 등 이렇게나 곳곳에서 언니들이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언니들은 주로 본인들의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그 현장감 있는 이야기는 듣다 보면 나도 그 상황에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그게 또 그렇게 공감이 갔다.

방송 모니터링 일을 20년 넘게 하고 있는 언니가 경험했던 노동의 한 단편 중 그 일이 한 가정과 한 사람의 '주업'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에 다 같이 분노했다. 그리고 언니들은 가족이 아프면 항상 돌봄 노동을 담당한다는 것에도 무한 공감대 형성! 두 아이가 동시에 아파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는 양쪽 아이들을 돌보느라 본인이 열이 펄펄 끓는 것도 모를 정도였고, 양가 어디든 부모님이 아프면 바로 투입되는 것은 언니들이었다.

언니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전 세계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오징어 게임」을 봤다. 주위에 무척 재미있다는 사람도 있고, 그냥 킬링타임용으로 죽여야 하는 시간이 있으면 보라는 사람도 있고, 촘촘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어서 궁금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무척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그건 스토리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다.


아는 얼굴이 나왔다. 그분이 나온 순간 '앗!' 하며 시선이 고정되었고, 화면 속에서 그분만 찾기에 바빴다.

바로 글쓰기 모임에서 함께 했던 '배우 언니'였다. 조연으로만 수십 년째 배우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모르는 게 당연할 거라고 하셨었던 그 언니였다. 주어진 한 대사를 달달 외웠지만, 그 컷에서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고 혹은 대사를 조금 버벅거렸다고 당장 교체되는 상황에 울고 웃고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 그 언니였다. (그리고 문득 그 언니가 박해수 배우와 함께 촬영한 이야기도 가볍게 들려줬던 것도 생각났다.)


'내가 아는' 배우 언니는 1화와 8화에만 나왔다. 아마 배우 언니가 나온 장면은 합쳐서 5분도 아니 3분도 안될 정도였지만, 나에게 「오징어 게임」의 주인공은 그 언니였다.


힘이 났다. 눈물이 날 정도로 힘이 났다.

'나 이대로 괜찮을까'라는 걱정이 드는 시기에 같이 글쓰기 모임을 하며 힘을 주었던 얼굴만 아는 언니가 '꿈이 있으면 괜찮아. 꿈꾸고 있으면 괜찮아. 이거 봐, 언니도 충분히 괜찮잖아.'라는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필명을 써서 이름을 모르는 배우 언니, 파이팅!




그 언니의 글을 다시 읽고 싶어 그때 글쓰기 모임에서 발간했던 '여성, 노동을 말하다'라는 책을 다시 펴봤는데 그 언니의 글은 실려있지 않았다. 최종으로 글을 책에 실을지 말지는 각자 결정했었다.

아쉽기도 하고 뭔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내 마음속 우주대스타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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