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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약사 Jan 08. 2023

보기만 해도 몸에 옻독이 올라와요

사랑으로 삶을 버텨내고 난 후에



“이놈의 옻! 내가 먹지도 않았는데! 

보기만 해도 이럴 것 같으면, 

내가 차라리 먹고 고생을 하는 게 낫지!”




먹지 않고 쳐다보기만 해서도 옻이 오른다니. 

정말 기상천외한 일이다. 

마음이 몸에 작용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그녀가 재치 있게 거짓말도 잘한다며 웃어넘겼을 거다.


“옻 오른 거예요? 

온몸이 다 그래요? 어디가 제일 심해요?”


가벼워진 옷차림 사이로 살짝 피부의 상태가 보인다. 

편안한 체격에 환한 웃음. 

아픔도 농담 소재로 삼을 수 있어 보이는 

쾌활하고 호기로워 보이는 여성. 


먹지도 않았다는데!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는데! 

이렇게 옻이 올라서 고생한다. 

참으로 신기하고 억울한 일이다.


“해마다 이래, 

작년까지는 병원에 몇 번씩 가서 주사 맞고 그랬는데, 

고생도 참 많이 했어.”




옻은 살균 효과가 뛰어나고 

비위를 따습게 덥혀주는 약재다.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승산산 약수터를 주말마다 졸졸 따라다녔다. 

철마다 산으로 들로 

개구리와 미꾸라지를 잡으러 다니셨던 아빠와 

꿩만두나 토끼고기 같은 

토속 음식을 종종 언급하시는 엄마 덕에 

옻은 친숙한 약재다. 


깔끔하지 못하게 음식에다가 

왜 거친 나무 막대기들을 넣고, 

구린 맛을 내는지.

피부에 난리가 난다면서 

뭐 하러 굳이 약 복용까지 하고 먹는지. 

이해할 수 없던 나도, 


어느새 특유의 구수한 풍미를 좋아하고 

그리워하며 종종 찾게 되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그분은 주말이면, 

가까운 산의 조그만 텃밭에 

옻을 심어 관리하신다고 했다. 


위암 초기까지 갔던 남편이 

옻을 먹고 싹 나은 뒤로 시작한 일이라고 하신다. 


신경 쓸 것도 많고 고되게 느껴지는 식당 일과 달리, 

주말마다 남편과 산에 올라가서 

아기자기하게 짓는 농사가 재미있다고 하신다. 


옻 덕분에 남편의 위 건강도 좋아지고, 

공기 좋은 산에 둘이 올라가 

밭을 가꾸는 게 행복하시다고.




“세상에! 

그러면 남편분 건강 때문에, 

계속하시는 거예요? 

남편분께 얘기해 보셨어요? 

내가 당신 좋아하라고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고생한다!”


“그 사람도 같이하니까, 

같이 힘든데 뭘 그런 얘기를 해


“그래도 한번 얘기해 보세요. 

그래서 남편분이, 

아! 당신 고생하는 거 내가 너무 잘 알지! 

정말 고마워! 

이런 얘기 들으면, 기분이 어떠실 것 같으세요?”


“그러면 기분은 좋겠지 ㅎㅎ”


손으로 입을 가리고 수줍어하며 웃던 

그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그날 그 마음을 남편과 서로 확인할 수 있었을까. 


서로를 아껴주고 

마음을 나눌 사람이 곁에 있어서 

삶이 아름답다고, 

아프고 지쳤을 때 

보살펴 주는 사람이 있어 감사하다고.




나에게도 고맙고 아껴주고 싶은 배우자가 있다. 

그를 만났던 당시의 나는 아빠를 잃고, 

꼿꼿이 바른 자세로 책상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로 문제집을 적시며 주로 시간을 보냈다. 


곧잘 머리가 너무 아팠다. 

늘 뇌가 반쯤 물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아빠가 투병하셨다기보다, 

병마에 린치 당한 듯한 

흔적이 남은 집에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 

밤마다 석촌호수를 헤맸다. 


당시 나는, 

모든 행위와 경험을 

‘수능이 끝나면’이라고 미루고 있었는데, 

죽더라도 ‘수능이 끝나야’ 죽을 수 있는 것으로 

희한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일 때만 

두통이 사라진다고 생각했었고, 

그는 나의 ‘아스피린 보이’였다. 




“봉사활동 같은 거 관심 있어?”

“봉사활동이요? 학교 다닐 때는 몇 번 했는데.”

“나는 너무너무 죽고 싶은데, 너랑 있으면 살고 싶어 지니까.”

“봉사활동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냥 내 옆에 있으면 돼.”




실체 없는 관념의 세계를 떠돌고 겉돌던 나는, 

세상에 오롯이 담겨있는 그가 부러웠다. 

분명한 시간과 현실 속에 존재하는 그가 좋았다. 


금기된 선을 궁금해하며 기웃거리고, 

극적인 상황들을 꿈꾸던 나와 달리, 

사회와 부모 말에 순순히 협조하고 

울타리 안에서 반듯하게 지내는 듯한 그가 좋았다. 


그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당연히 안 되는 것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감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냉정하게 현실의 우선순위를 놓지 않고, 

소시민적인 삶의 가치를 높이 쳐주며, 

규칙들을 준수하는, 

나와 다른 그가 한없이 신비로웠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던 내가 아닌, 

그처럼, 

그가 살아온 방식으로 살았다면, 

나는 아빠를 잃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빠를 잃고, 엄마가 힘든 이유가 

내가 착하고 고분고분한 딸로 

살아오지 못한 것의 결과인 것만 같았다. 


나는 그렇게 내 마음을 버리고 

그를, 다른 사람을, 세상을 

나보다 더 사랑하기로 했다. 




새로운 생명과 창조를 꿈꾸며 

끝없이 끝없이 다시 태어나길 소망했다. 

그가 주는 시간과 감각에 감사하며, 

내가 아닌 그를 숭상할 수 있어 행복했다. 


내가 몹시도 좌절스럽고 싫던 나는, 

그가 감싸 안았을 때만 존재 가치가 있었다. 

슬픔도 절망도 그와 함께라면 잊을 수 있었다. 

영원히 영원히 순간이 멈추길 바라며 

울고 또 울었다. 


오직 그를 통해서만 삶을 긍정할 수 있었고,

그를 사랑하는 것만이 

내가 살아있어도 되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렇게 그는 나의 종교였고 

구원의 길이었다. 




그의 방식대로, 

그의 곁에서, 

그에게 인도받으며 살면,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심한 내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관계에 대한 불성실이 보완되고 

해결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누군가를 아빠처럼 외로움 속에 두고 

외면하지 않고, 

더 이상 아무도 

쓸쓸하게 죽도록 남겨두는 사람이 

아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믿으려 했다. 

언니를 잃기 전까진.




착각이었다. 

여전히 나는 나였고, 

그는 그일 뿐이었다. 


그의 마법은 

그가 속하는 세계에서만 효력을 발휘했고, 

나의 주변은 여전히 서먹하고 

냉랭함이 깔려 있었다. 


나를 미워하고, 

그를 추종하며 형성해 온 세계가 

나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지 못한다.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파악을 미룬 채, 

(혹은 내가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위기감에 빠질 때마다, 

근사한 것들에 

맹목적으로 나를 던져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것과 가까워지면, 

그 좋은 것들에 취해 있으면, 

문제가 사라지는 거라고, 

아픔을 잊게 될 거라고 믿으며…




그렇게 시작된 그와의 시간이 

근 20년을 채워간다.  


삶의 절반은 부모님의 그늘에서, 

절반은 그와 함께 보낸 셈이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에겐 그가, 

그에겐 내가 보호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말년에 농사를 짓지는 않고 

컴퓨터를 두 대 놓고, 

온라인 게임을 같이 하기로 했다. 


삶을 살아갈 때, 

나보다 그를 사랑하는 게 

더 쉬울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못한 듯하다. 

깊이 들어가기는 언제나 늘 어렵다. 


관계에 의미를 더하기 위한 헌신이 

의지만으로 잘 되질 않는다. 


그리고 사랑이 아닌, 

좀 더 성숙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끊이지 않는다. 


내가 유예시켜 놓은, 

구축하지 못한 나의 세계에 대한 갈망 또한 남아있다. 




6월의 수국은 

한 달 내내 푸르렀던 꽃잎을 

초록으로 지운다. 

자기는 원래 잎이었다고, 

냉담한 푸른 꽃잎 따윈 

처음부터 내게 없었다고. 


그저 수많은 초록빛 이파리 중의 

하나인 것처럼 

초록은 동색이라고 

시치미를 뗀다. 


그래도 내년이 되면 

다시 푸르스름한 꽃을 피우고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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