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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미 Sep 28. 2021

우주에 알몸으로 혼자 있는 것처럼 시리고 외로운 이유


스무살이 된 이후, 미친 인싸처럼 살았다. 모든 동아리 행사를 가고, 학과 생활에 녹아들려 애쓰고, 모든 술자리를 다 참석했다. 나중에는 동아리 회장도 하고 학생회장도 했다.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오래 살았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릴 정도로.


사람이 오랫동안 혼자있게 됨, 생각보다 많은걸 할 수 있다. 뭐뭐해야지, 하고 결심하는게 아니라 어느날 정신차려보니 그걸 하고있다는 식으로.


어느 날엔가 저 문장을 보고는 어릴 때가 생각났다. 오랫동안 책을 읽었고 메모를 썼다. 어느 날엔 시험지 뒷 장, 어느 날은 아무렇게나 꺼낸 노트. 언제는 네이버 메모장, 어느 날에는 '달에 쓰는 일기' 어플. 등하교길엔 언제나 핸드폰을 쥐고 소설을 봤고, 도서관에는 매일 출석했고, 집에는 오래 써왔던 메모장이 그득 쌓여있었다.


'오랫동안 혼자있다보면'. 그토록 몰두했다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혼자있었다는 뜻이다. 4남매에 매 년 단짝 친구도 생겼고, 누가 봐도 딱히 혼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속마음이 많았다. 속상하고, 우울하고, 불안하고, 슬프고. 그런 마음들을 꾹꾹 적었다. 책과 기록에 정신없이 쏟아부은 욕망들이 내 곁을 지켜주었다.


남자친구도 많이 사귀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보다 내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탓에, 해로운 만남도 여럿 있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좋은 사람을 만났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외로웠다. 집에 혼자 있다가, 우주에 알몸으로 혼자 남은 것처럼 시리고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울면서 전화를 했다. 나, 외로워. 너무 외로워. 혼자 남은 것 같아. 나 혼자인 것 같아.



정신없어하는 내게 그는 샤워를 권했다. 위로의 말을 바랐지만, 이미 여러 번 그랬던 탓에 차라리 현실적인 해결책을 권했던 것 같다. 울면서 샤워를 했더니 기분은 조금 나아졌었다. 언제나 누군가가 나를 달래줄 수는 없다. 24시간 나와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24시간 나를 달래줄 수도 없다. 그걸 알기에 외로움도 꾹꾹 참았다. 그러고도 폭발하는 날이라서 그런 건데도, 여러 차례 이어지자 좋은 사람도 서서히 지쳐갔다.


이 외로움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알고 싶었다. 가슴이 시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싱크홀이 하나 있는 것 같았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쉴새없이 연애를 했던 것 같다. 연애를 하면 행복하다고 하니까. 가슴 속의 퍼즐이 딱 맞춰지는 것처럼,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고들 하니까.


맞지 않는 퍼즐을 만났을 때는 내가 맞추려고 애썼다. 친구들에게 남자친구 얘기를 하면 욕을   뻔해서 말할 수도 없었다. 이상한  알아도 이해하려 애쓰면서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했다. 누구와도 맞지 않는  같은  퍼즐을 맞추고 싶었다.


지식인에도 써보고, 연애와 관련된 블로그 글도 많이 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해로운 조언들도 많았다. 여자니까, 여자친구니까 남자의 이런 부분은 이해해줘야 한다는 내용들. 그때는 그게 맞는 건줄 알았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연애에서만 그런 건 아니었다. 대학에 가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꿈처럼 그리던 사람들이었다. 타인을 존중하고, 옳은 것을 위해 실천하고,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들의 말에 모두 동의하고 모두 함께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들 중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 생각을 죽였다. 그들과 동의되는 부분만 내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무기력이 찾아왔다.


무기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내 생활을 잡지 못해 너무 많아진 약속. 너무 많아진 할 일들. 그러다보면 이중 약속을 잡곤 했다. 지각을 하거나, 해야할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고장나버리거나, 빚을 지곤 했다. 그 모든 결과는 내게로 돌아왔다. 언제나 사과하는 사람이었다. 잘못된 행동들이니까. 문제는, 나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상담을 받기 시작한 뒤로 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땅 속 깊숙히 묻어두었던 내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나는 훨씬 더 냉소적이고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단지 그런 것들을 말하려면 눈물부터 터져나왔다.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꺼내서, 상대방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싫어하지 않을 걸 알지만, 그 사람의 마음이 상하면 어쩌지?


상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선생님이 물었다. 상하면, 아파요. 속상해요. 너무 슬퍼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가버리면 어떡해요.  갔으면 좋겠어요. 가버리면, 저는 어떡해요..



상담에서는 그런 연습들을 했다. 내 생각을 말해도, 내 요구를 말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이해해주려고 하는구나.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서기도 하지만, 당연한거구나.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주는구나. 나조차 알아주지 않으면 평생 아무도 모르는 거구나.


그걸 알게 되었어도 한참은 더 연습해야 했다. 한 해의 목표를 '솔직해지기'로 잡았던 적도 있다. 그 뒤로 2년여가 더 지났지만, 아직도 연습중이다. 나는 아직도 많은 것들에 솔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관계 속의 작은 것들부터 시작했고, 이제 그것들은 자유롭게 솔직해질 수 있다. 지금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에 있어서 내 솔직한 마음을 인지해보려고 하고 있다.


무기력의 원인은 다양하다. 내 경우에는 '꺼내지지 못한 불만'이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있는데, 그것들이 현실에 표현되지 못하고, 구현되지 못하니 당연히 원치 않는 현실이 될 수 밖에.


그것들이 반복되면 결국 현실은 바꾸지 못하고 안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던 것은 나의 내일이 기대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장 편안한 것은 무엇과도 투쟁하지 않고 잠으로 빠지는 거였다. 그건 매일 죽는 것과도 비슷했다.


중요한 것은 큰 방향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향이었다는 점이다. 좋아하는 일을 했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엄마와 싸우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삶을 얻어냈다고 여겼다. 하지만 작은 부분들에서 그렇지 못하면 그건 원치 않는 삶이었다.


그럴 때 나는 최강의 고집불통이 되었다. 내가 묻어둔 욕구를 건드리는 사람이 있으면 예민해졌다. 그건 틀렸어, 내가 선택한 것이 맞아. 그 마음을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걸 꺼내는 순간, 좋다고 느꼈던 나의 삶은 틀린 것이 되니까.


삶에는 맞는 것도 틀린 것도 별달리 없었다. 내가 원하면 하고, 싫으면 안하면 된다. 복잡한 선택지가 있으면 좋고 싫음을 저울질 해서 선택하면 된다. 그래도 딱히 큰 일이 생기지 않는다.


묻어두었던 욕구를 꺼내고 인정하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별달리 싸울 일도 없게 되었다. 자연히 그때보다 지금이 외로움도 덜하다. 그럴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방법을 찾게 되었다. 맞지 않는 퍼즐은 밀어내고, 나에게 맞는 퍼즐을 찾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과 그나마 좋은 것들로 삶을 채워가면 된다. 누군가 떠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내일이 기대되지는 않더라도 일어나고는 싶은 삶이 되었다.


바람에 흔들리고, 때로는 세차게 흔들리더라도.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지켜낸 이 삶이 소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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