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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미 Sep 27. 2021

스프를 끓였다

허여멀건 스프 속에서 위로를 찾았지만

스프를 끓였다. 이미 허기진 배를 양파과자로 채워버린 다음이었다.


점심을 거하게 먹고, 저녁은 커피 한잔으로 때웠다. 5시부터 10시까지는 아르바이트였고, 요즘 살이 쪘다는 생각이 들어 저녁을 거르곤 아침까지 버틸 작정이었다. 간헐적으로 식사를 하지 않으면 살이 금세 빠지곤 했기 때문에. 하지만, 위로를 찾다 찾다 못참고 말았다.


작고 소중한 침대에 누워, 온기어린 주홍빛 무드등 아래서 웹툰을 보다가, 감자 과자가 흩날리는 장면을 보곤 참을 수가 없어서 양파 과자를 꺼내들었다. 동생 방으로 가니 동생은 컴퓨터 의자에 앉아 잠들어 있었다.


이 과자, 네거야? 끄덕. 나 조금만 먹을테니까 나머지 다 너 먹어야해? 나 살찌니까? 끄덕.


저녁을 안먹었더니 배고파 죽겠어. 주섬주섬 먹다보니 어째 금세 바닥이 만져진다. 뭐야. 언제 이렇게 다 먹었어. 에라, 다 먹어버리자. 이미 입안에 남은 밀가루 맛이 텁텁한데, 바닥을 비워버렸다. 윽, 안돼. 더이상 못 참아.


스프를 좋아한다. 어릴 적 엄마가 끓여주던 잣 스프. 스프라기엔 분말유 20%밖에 들어있지 않은, 찬물에 끓이기만 하면 되는 인스턴트 스프. 보글보글 찬물을 끓이고는 가루를 털어넣는다. 1대1이니까, 물 300g에, 스프 30g. 우유를 넣으면 조금 더 풍성한 느낌이 들까? 다음엔 그렇게 먹어봐야겠다.


잘 풀리지 않아 엉킨 가루를 풀어내며 휘적휘적 냄비를 저었다. 냄비 긁히니까 나무 볶음 주걱. 휘적휘적, 뭉텅이진 밀가루 덩어리는 떠내고, 풀어서 다시 따라내고. 다시 떠내어 풀고, 따라내고. 휘적휘적. 둥실둥실. 드륵드륵. 보글보글보글.


희멀겋다는 말밖엔 표현할 길이 없는 스프는 예쁜 그릇에 따라준다. 나는 귀하니까 소중한 그릇에. 달칵, 따라낸 냄비는 설거지통에 넣는다. 물만 담궈놓고 설거지는 내일하자고. 하지만 못할 것을 알고있다. 왜냐하면 8시엔 일어나야 하고, 10시에는 회의를 가야하고, 2시부터 9시까진 또 아르바이트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습 월급을 주지 않는 사장을 욕하며 또 어떻게든 버텨내겠지.



달칵, 다시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는다. 온기어린 주홍빛 무드등, 잔잔히 흐르는 블루투스 스피커 속 목소리, 따듯한 수프 그릇, 부드럽고 말캉한 침대. 여기에 누우면 나는 내일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후추를 뿌렸다. 물과 적당히 섞인 스프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후추를 뿌리니 간이 딱 맞다. 처음부터 완성되지 않아도 무언가를 첨가해 완성되는 것이 있다.


한입, 또 한 입. 스프를 넘기면서 생각한다. 나는 내일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고 싶어. 나는 그 위로를 어디에서 얻지. 위로받고 싶어. 이 스프 한 그릇에라도. 나를 위한 이 위로 한 조각에라도. 마음을 뉘이곤 포근하게 잠들고 싶어.


분명 아침에는 잠에서 깰 것이다. 하나도 기대되지 않는 오늘을 맞이하기가 싫어 다시 잠에 들테지. 회의에 가지 못하면 그 자괴감이 또 나를 짓누를테지. 그러다 잠들어버리고 아르바이트도 늦어버릴테지. 뻔하다. 그렇다고 변화된 일상을 맞이하기란, 기대되지 않는 오늘을 맞이할 힘이란 내게 없다.


한 입, 한 입 먹으면서 생각한다. 일렁이는 불빛을 보면서 생각한다. 아, 위로받고 싶다.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고 싶다. 입안에 남은 후추 조각이 쓰게 씹힌다. 그릇을 치우곤 양치를 한다. 개운하고 찝찝한 느낌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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