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고등학교 때 별명은 인호였다.
친구 정은은 독서력과 분석력을 총동원하여 지선을 '인기 있는 호구'로 불렀다. 정은 덕분에 지선은 그 시절 부모에 대한 원망에서 조금은 벗어나 힘들었지만 자주 기뻤고 얼마간은 마음을 담담하게 다져갔다. 물에 기름이 엉긴듯한 미끈거리고 불쾌한 덩어리들이 정은이라는 거름망을 통하면 기름이 떠올라 잡스러운 것들은 걸러져 마음이 투명해졌다.
- 너 사람들이 호감은 있어하잖아. 그게 어디야?
지선은 기분 나빠할까 제법 아부를 떠는 정은이 고맙고 귀엽다.
- 그래 나 인호다 인호. 담에 남자친구 인호로 해라. 쩡은
- 뭐래. 난 엄마처럼 절대 안 살 거야. 남자는 50대에 만나서 끝사랑만 할 거야. 헤어지고 만나고를 왜 하냐"
- 오오. 역시 천재야. 울 정은이
지선은 앞서가는 정은을 따라가 팔짱을 끼며 대학 생활, 남자친구, 사랑 등 미래에 대해 생각하자 마음속 여러 인격들이 다투는 소리를 듣는다. 책임감 인격은 고모가 살림을 잘한다는 소리와 아빠가 말한 동생 잘 보는 착한 딸 칭찬을 기억해 낸다. 아빠가 원망스럽고 두 번째 여자를 데려온 날은 드디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아빠가 안쓰럽기도 하고 칭찬이 좋기도 하다. 거기다가 고작 몇 살 터울이 안 나는 남동생들이 불쌍하고 챙겨야 한다는 의무감을 데려오기도 했다. 동시에 팽팽한 힘을 가진 해방감 인격은 자주 나타나 집을 나가고 싶거나 죽고 싶다는 생각을 충동질했으며 결핍 인격은 관심받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해 굶게 만들고 거울을 볼 때마다 자괴감을 선사했다.
- 표정 보니 생각 많아지네 또. 사라져. 사라져"
지선은 첫 선택 결과에 만족했다. 속 깊은 정은이 건네는 다정하고 단정한 충고들을 만나 인격들을 잠잠하게 만드는 기적을 알게 되었다. 비록 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은 책임과 죽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번번이 비참했지만 겉으로 보기엔 모범적이고 아빠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다.
중3 고등학교 선택은 오롯이 지선 몫이었다. 은수는 엄마를 따라 서울로 가야 했다. 은수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 등쌀에 괴롭기도 했고 지역 국회의원의 당선을 점친 이후로 손님이 많아져 그 참에 서울로 옮겨 가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래서 지선은 처음으로 을 수 없이 스스로 살아내야 했다. 은수는 자주 전화하겠다고 했지만 지선은 혼자 지낼 길을 찾아야 했다. 은수에게 떠나는 전날까지 화도 내고 매일 울다가 어느 날 지선을 결심을 했다.
'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지 말자. 벗어나자. 나를 아무도 모르는 학교로 가서 시작해야 해'
지선은 일단 중학교 친구들이 쓰지 않는 고등학교를 1 지망으로 골랐다. 내신 받기 어렵다는 지옥의 여고로 썼다. 고등학교 목표도 정했다. 서울로 대학을 가는 것과 친구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다. 우선 지선은 죽기 살기로 살을 뺏다. 지선은 버려지고 혼자가 되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은수를 만나기가 힘들어져서 그런지도 몰랐다. 지선은 입학 후 관찰한 결과 여학생들은 외향적이고 털털하고 적당히 예쁘고 공부를 좀 해야 동경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억지로 더 크게 웃고 소심하지 않은 척하며 나대기 시작했으며 성적을 상위권으로 유지했다. 아빠의 여자들이 많아질수록 수치스럽고 떠난 엄마가 원망스러운 크기만 틈 더 인기가 많고 대단한 사람이 돼야만 했다. 중학교 때처럼 버려지는 건 끔찍했다. 모든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다 들어주고 싫어도 웃었다. 친구가 많아졌지만 같은 반 미정에게는 이길 수 없었다. 미정은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근처 남고 애들도 교문 앞에서 앞다투어 고백을 했다.
'좋은 집안에 공부도 잘하고 예쁜 엄친딸에 반장도 하며 선생님들도 좋아하는 아이. '
미정은 주목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였다. 게다가 미정은 돈도 잘 쓰고 시원시원한 면이 있었다. 여학생들이 호감을 가질만했다.
'이제 중학교 때처럼 찐따로 지내지 않을 거야'지선은 미정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초라한 자신이 들킬까 봐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더 크게 웃고 대범한 척했다. 미정이 하는 부탁을 지선은 불평 없이 들어주었다. 미정은 늘 약속 시간에 늦었고 반장이 할 일을 부반장 지선에게 미뤘다. 거기다가 미정은 지선을 친구라고 했지만 어떤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본인 말만 했고 거울만 봤다. 미정은 여자 후배들, 남학생들에게 편지, 선물을 많이 받았고 일부를 지선에게 나눴다. 지선은 그나마 정은 다음으로 공부를 잘했고 미정을 앞섰기에 질투는 참을만했고 수치심도 잊을 수 있었다. 어쩌면 성적이라도 괜찮게 나와서 미정과 같이 다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가끔 미정과 독서실을 다니다 보면 남자애들이 지선에게도 고백을 하곤 했는데 난 공부 해야 돼, 사귈 마음 없어 대신 미정이 불러줘?라고 빈정거렸다. 무심결에 나온 말들은 지선에게 부메랑이 되어 상처를 냈지만 무시했다.
고1 중간고사 첫날, 미정이 지선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 썬. 나 어제 공부 안 하고 잤어. 너 국어 잘하잖아. 몇 문제만 보여주라.
- 어? 그래..." 지선은 가슴이 세차게 쿵쾅거린다. 거절은 못 하겠고 식은땀이 흐른다. 서울로 대학가야 하는데, 이 부탁을 거절하면 미움을 받게 될 텐데 머리가 쥐어 뜯기는 기분이다.
- 야. 너희 들키면 0점 처리될 텐데... 그러지 말고 내가 찍어줄게
미정 앞자리 정은이 뒤돌아 보며 웃는다. 지선은 고맙기도 하고 미정에게 쩔쩔매는 못난 자신이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발갛게 귀까지 달아올랐다.
- 그래? 썬 대학 가야지. 썬 미안. 썬은 그래도 보여준다고 했어. 역시 썬 뿐이야 나는
미정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가 펴지는 걸 정은은 알아챈다.
'지선, 저 등신 같은 게.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정은은 전교 1등답게 늘 책을 보거나 문제집을 풀었고 친구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지선은 정은이 눈에 띄지 않았고 공부 잘하는 애 정도로 보아 넘겼다. 입학 후 며칠 후 정은과 지선은 동시에 담임에게 불려 갔다.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께 하얀 봉투를 건네받았다. 정은은 고개를 꾸벅 고 했지만 지선은 담임 손에서 뺏듯이 봉투를 낚아챘다. 한 부모 가정을 지원하는 내용 서류가 들어있었다. 들키고 싶지 않은데 이런 지원 서류들은 늘 정은을 들키게 했고 부모가 수치스러웠다. 정은과 눈이 마주쳤는데 정은이 싱긋 웃으며
- 너랑 같이 받아서 난 좋은데.. 난 생보자인데 넌 뭐냐?
좀 어이가 없었지만 자신보다 한 걸음 앞으로 가는 키 작은 정은을 서서 유심히 바라봤다. 정은은 그 뒤로 학교에서 여전히 친한 척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둘은 편지도 주고받고 학교 밖에서 자주 만나 놀았다. 정은에게 쓰는 죽고 싶어로 시작한 맹렬하고 수치스러운 글들 덕분에 지선은 떠난 은수를 잊을 수 있었고 문제집을 풀어낼 수 있었다. 지선은 학교에서는 미정과 공식 절친이었다. 한참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얻으면 사는 것이 목표이던 시절이었고 미정과 함께 다니며 받는 시선과 예쁜 애 옆에 예쁜 애라는 말들을 즐겼다.
지선은 미안하고 한편 정은을 좋아하는 마음에 부모의 이혼, 자해, 은수 등 모든 비밀을 말했다. 정은을 놓치고 싫었고 미정 옆에서 놀고도 싶었다. 끝으로 너만 아는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섭섭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도.
- 음 이 책에 의하면 넌 불안 애착형이야.
-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어렵게
- 음... 이거 봐 이거 봐 넌 내가 떠날까 두렵지?"
지선은 이제 은수가 많이 그립지 않다. 정은 덕분에 나름 잘 버티고 있다. 아니 살짝 행복하기도 했다. 그렇게 버티고 참아 드디어 지선은 은수가 있는 서울로 진학했다.
대학 진학 후, 정은이 그 시절 많이 섭섭했다는 걸 알고 술 먹으며 둘은 꺼이꺼이 울었다. 고등학교 시절 지선은 자기 상처가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팠다.
-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셔?'
지선은 은수 표정을 살핀다.
- 어머니 이제 정말 유명하시지. 돈도 많이 버시고."
은수 엄마는 어느 날 유튜브에 출연해 유명 배우 앞날을 예측하는 말을 했고 실제로 그 배우는 얼마 후 갑자기 자살을 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은수 엄마의 유명세로 이어졌다.
- 한번 가서 정섭이랑 결혼해도 되는지 물어야겠다."
- 예전에는 너무 신경 쓰일 것 같다고 싫다더니?"
지선은 묻지 않아도 안다. 정섭과 결혼은 안될 것이다. 점을 치는 건 불안하고 막막할 때인데 지선은 파혼이 그리 불안하지 않다. 다만 과정이 귀찮았다. 멀쩡하게 정신을 차리고 정섭과 대화를 하기가.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만이 점이라도 치는 것이 아닐까. 끝을 본 결론에는 미래가 없다. 반면 다른 차원에 붙들려 버린 은수의 엄마와 이혼 후 삶에 붙들린 지선의 아빠는 자식을 방치했고 부모를 잃은 둘은 끝을 모르는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