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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Sep 11. 2024

소확혐

나쁜 기억 안아주기

- 이제 그만 좀 하자. 응?

지선은 정섭 눈이 휴대폰에 고정되었을 때 찌푸려진 주름들을 본다. 정섭은 결심한 듯 표정을 바꾸고 지선을 향해 속내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띤다. 지겹다는 표정을 애써 지우고 부모 이야길 하면 복잡한 마음이 되어 글썽거리는 지선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지선은 뒷말들을 짐작할 수 있다.

' 합리적이고 적합한 말을 찾아내겠네.' 

- 지선아.  알지 우리 자기 힘들게 살아온 거. 요즘 우리나라 가족 중 반이 이혼 가정이야. 내가 있잖아. 내가 외롭지 않게 할게. 나 믿어."

지선은 믿고 싶다가도 '네가 뭘 알아' 하는 반감 사이에서 객관적인 정섭의 말에 주눅이 든다. 

- 고마워. 나 와인 먹고 좀 그랬나 봐.

- 아 잠깐 미안. 나 급한 전화 좀 받고 올게

일어나서 레스토랑 바깥으로 나가다 정섭은 지선 쪽으로 고개를 돌려 웃는다. 그리고 뒤를 돌아 전화를 황급히 받으러 나간다. 지선은 정섭 뒷모습을 보면서 유튜버 저주 가족을 떠올린다. 유튜버는 "남 탓의 쓸모"를 섬네일로 하여 정상가족이 얼마나 허구인지 객관적인 문헌 자료와 신문 기사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그는 부드러우면서도 저음의 목소리에 강약을 조절하며 힘 있게 마지막 결론을 이어갔다. 

- 부모의 미성숙한 처신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가족 제도  정상 범위가 너무 가혹하고 이혼 가정에 대한 수용도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게이들의 수용도를 보면 유럽 평균이 10점에 8점 정도인데 우리나라는 겨우 3점 정도인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회가 문제이지 당신이 약한 것이 아닙니다. 남 탓을 실컷 하시고 자유로워지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는 걸 기억하세요. 제가 돕고 싶습니다. 하하 하하

남자친구 말보다 낯선 유튜버에 더 위로를 받는다고 하면 정섭은 무슨 말을 할까? 저녁 내내 지선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정섭에게 어색하고 답답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잘 짜인 각본을 정섭이 만들어주면 지선은 최선의 연기를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정섭 각본에서 지선은 구제해야 하는 가련한 여자 주인공일까? 아니면 말 잘 듣고 예쁜 호구일까? 

지선은 톡으로 전달된 약속 장소를 확인한다. 스튜디오 도희, 저녁 7시를 일정 노트 앱에 기록한다. 

‘도희, 여자친구 이름인가.’

살짝 떨리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 기분이다. 정섭이 테이블로 오는 걸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으로 일정 노트 앱을 닫는다.

은수가 머리를 쓰다듬는다.

지선은 거실 바닥에 모로 누워 켜둔 화면을 바라본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들어찬 은수 염려와 배려가 어느 순간 눈물이 될 것을 짐작했다. 그 배려에 안심하며 눈물이 귓불을 타고 그날 기억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다. 자신이 기억하는 그날 그 순간에 도영은 동정했을까 혹은 걱정했을지를 생각한다. 여러 번 재생 중인 유튜브 채널 영상에서 지선은 카메라를 자주 바라보며 웃고 있다. 카메라는 기쁘게 지선을 기억한다.

스튜디오 도희. 나무 간판 글씨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라벤더색 출입문이 특이하다고 생각하며 문을 당기려는 순간 휴대폰 진동을 느낀다. 지선은 정섭이라면 거절할 생각으로 액정을 바라본다. 정은임을 확인하고 통화를 누른다. 

- 썬. 거기 혹시 뭐 이상한 곳 아냐. 사이비 종교 단체 이런 거. 나 지금이라도 가? 혼자 보내는 게 아닌데. 갑자기 뭐 하러 그런 델 가. 인스타그램도 부담스럽다고 안 하는 애가.

- 잔소리 그만. 아니야. 괜찮아. 나 사무실 앞이야.

- 뭐 맨날 괜찮데, 암튼 이상하면 바로 전화해. 나 대기 중

- 끝나고 전화할게. 얼른 저녁 먹어

지선 회사 근처라 쉽게 찾았지만 출입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서기가 더 어렵다. 숨을 크게 한번 쉬고 문을 열고 들어선다.  평소 지선은 이혼 후 일상을 자유로운 삶인 양 허세를 떠는 모 배우에 대해 환멸을 느껴 외면했고 부모 이혼을 감성 팔이하는 예능에 연예인을 보면 부끄러웠다. 무엇에 홀리듯 신청을 해서 이 자리에 있는지 지선은 스스로를 납득시킬 준비를 했다.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저 사람 때문일까라는 의문이 잠시 내적 친밀감으로 변한다. 영상을 너무 많이 봤구나. 당황스러운 감정을 다독이며 지선은 머뭇거린다.

- 안녕하세요.

큰 테이블 앞 파티션 너머 책상이 놓여있다. 벽이 옅은 아이보리색이라 그런지 책 제목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주로 정신 심리학, 소설 등 책들이 가득하다. 거북목이 될 듯 열중하던 남자가 모니터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고 지선을 돌아보고 크게 웃으며 지선 쪽으로 다가온다.

- 안녕하세요. 제가 지도 영입니다. 김지선 씨죠?

- 네. 김지선입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린다. 예상치 못한 떨리는 목소리에 스스로 잠깐 놀란다.

- 반갑습니다. 이쪽에 앉으시죠. 음료 뭐 드릴까요? 커피 좋아하시나요?

- 네... 감사합니다.

익숙한 듯 한쪽 싱크대에서 정성을 들여 드립을 하는 도영을 바라보니 불안이 약간 내려가고 그 자리에 호기심과 기대가 살짝 올라온다. 도영이 다가오자 커피 고소한 향, 과일향이 퍼지고 건네받은 라벤더색 머그 컵에 '마음 챙김'이라는 프린팅이 새겨져 있다. 이 어색한 번역은 뭘까? 마음을 어떻게 챙긴다는 걸까? 지선은 낯선 단어에 호기심이 점점 더 커진다. 

커피를 마주 들고 앉자 남자 얼굴이 자세히 보인다. 또래이거나 조금 어려 보이기도 하고 키는 좀 크지만 마른 듯하고 하얀 셔츠와 청바지가 깔끔한 느낌을 풍긴다. 다부진 입매와 날카로운 콧날을 가졌지만 눈은 깊어 차분해 보이는 인상이다.

- 지선 씨, 신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드린 메일 보셨겠지만 오늘은 저랑 개인 인터뷰를 진행하고 일주일 후 다른 분들이랑 같이 이야기를 나눌 겁니다.

- 얼굴은 나가는 건가요?

- 원하시지 않으면 주로 얼굴 아랫부분만 나갑니다.

지선은 조금 길게 생각한다. 문이랑 머그컵 색이 동일하다는 생각이 든다. 라벤더색은 의미가 있나.

-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 네. 물어보시죠.

- 왜 첫째 딸인가요? 그게 제일 궁금하네요.

- 아. 이혼 가정 자녀들 출생 순위에 따라 다양하게 찍어보긴 할 건데요. 누나가 생각나서 첫째 딸부터 찍어 보려고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늘 누나가 전부였거든요.

살짝 눈 주변에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 요즘 왜 이럴까. 지선은 들키기 싫어 커피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되도록 천천히 마신다. 

- 그럼 인터뷰를 진행해 볼까요? 그냥 저랑 이야기 나누시면 돼요. 얼굴은  가려드릴까요?

- 네. 좀 자신이 없네요. 

- 편하게 얘기하세요. 나중에 편집본 보내드리니깐 원하지 않는 부분은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카메라쪽에서 제가 질문을 해드리니깐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 자유롭게 하세요. 

도영은 카메라 뒤편에서 옅게 웃으며 오른손으로 접힌 왼쪽 소매를 끌어올린다.  지선은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다. 도영은 기다려준다.

- 부모님은 자주 심하게 다투셨고 제가 5학년 때쯤인가 엄마가 집을 나가셨어요. 엄마가 집을 나간 뒤엔 거의 제가 집안일을 다했고 아빠는 여러 여자를 만났고...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기 시작하자 지선은 이야기를 길게 할 수 있을지 가늠했다. 어색한 시간이 흘러간다. 도영이 조용히 티슈 몇 장을 뽑아서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물도 챙겨 와 지선의 시선이 머문 곳을 맞추어 둔다. 

- 학교를 다니는 동안 외롭고 억울했죠. 남동생들을 챙기고 공부를 하고 매일 왜 딸인 나만 이런 걸 감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초등학교 때부터 밥을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그런 일들이 너무 싫었어요.

- 아버지랑 사셨나 봐요. 저는 엄마랑 살았거든요. 근데 저희 엄마는 나 세탁기 돌리게 하던데 누나 안 시키고. 

지선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어색하지만 긴장은 살짝 풀린다.

- 죄송해요. 제가 괜히 지선 씨 말하는 거 방해했죠?

- 아니에요. 좀 안심이 되네요. 불안했거든요. 이런 말 친한 친구 말고는 처음이라.. 그것도 카메라 앞에서...

도영이 잠시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지선은 또 그렇게 안심이 된다.

- 사실 저도 부모님 이혼에 대해 숨겼었어요. 그 맘 이해해요. 

- 네.. 그땐 왜 그랬을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피해의식이 있었나 봐요. 

피해의식이라는 단어에 지선은 흠칫 놀란다. 피해의식이 있었구나. 방금 깨달았다. 자신이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을.. 도영은 몇 가지를 더 물었는데 지선은 횡설수설 많이 말한다. 도영이 건넨 티슈를 테이블 아래에서 구기며 아팠던 생생한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최대한 덤덤하도록 애를 써본다.

- 수고 많으셨어요. 일주일 뒤엔 제가 좋아하는 상담가님이랑 다른 세분이랑 같이 이야기 나눌 계획인데 괜찮으시죠?"

- 네... 저 조금 다른 질문인데 왜 채널 이름이 저주 가족인가요? 

도영이 늘 듣는 질문이라며 지선을 향해 크게 웃는다.

- 하하 저주 인형 아시죠?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저주를 비는 저한테는 가족이 가끔 저주 인형 같아서요. 아버지는 저주 인형이고 우리 가족은 저주에 걸린 것 같았어요.

도영이 테이블 한끝을 응시하다 이내 지선에게 눈길을 돌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인다.

- 누나가 절 이만큼 자라게 했어요. 누나는 엄마랑 저의 보호자였죠. 이혼가정 이야기에서 그냥 제일 처음 장녀들의 삶을 좀 들여다보고 위로를 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너무 많은 말을 하네요.  사실 지선 씨가 누나를 좀 닮아서요...          

인터뷰를 진행하고  집으로 돌아와 회사를 다니는 일주일이 지선은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하루는 짧았다. 모르는 사람에게 속내를 이야기한 것도 직선 답지 않지만 연애 초기 정섭이 사귀기 위해 했었던 '너무 예뻐졌다. 너 좋다'는 말보다 도영이 누나를 닮았다던 그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 이유를 생각하느라 퇴근 시간은 금방 왔다. 

일주일 뒤, 지선이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땐 여자 두 명이 어색해하며 앉아 있었고 도영은 숏 컷을 한 여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선을 본 도영이 카메라 앞 테이블로 안내를 하자 출입문을 열고 마지막 한 사람이 발랄하게 들어와 웃으며 도영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선은 순간 새 학기 첫날, 서운하고 낯선 기분이 들어 도영을 보던 눈을 재빨리 휴대폰 화면으로 옮겼다. 

잠시 후 도영은 카메라 옆으로 와서 대화를 나누던 여자를 소개했다. 

- 지난 시간에는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했고요. 오늘은 좀 더 전문적으로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실 상담사 분과 함께 녹화를 진행합니다. 손혜민 상담사님이세요.

상담사는 쇼트커트에 강단 있는 입매였지만 눈은 지선이 만났던 그 누구보다 더 여리고 따스한 눈이었다. 지선은 도영과 친밀하던 여자가 상담사라는 말에 기분이 나아진다.

- 안녕하세요. 손혜민입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 인터뷰한 영상을 대표님 통해 미리 좀 봤어요. 그동안 어떤 마음이셨을까.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면서 봤고요.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면 기쁘겠다 생각했습니다.

지선은 정섭이 힘겨웠던 마음과 고통에 대해 급하게 해결해 주려 하거나 만들어진 동정을 하기보다 시간을 들여 공감했다면 달랐을까를 생각했다. 

- 사전에 대표님이 본명을 대신할 별명을 생각해 오라고 하셨을 거예요. 별명을 정한 이유도 같이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지선은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서로 눈치를 보았지만 지선의 오른쪽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저는 '자유'입니다. 부모님 이혼 이후에 너무 놀지를 못해서요. 좀 자유롭고 싶어서요. 부잣집에 태어나 돈 막 낭비하고 막살고 싶어 정했어요.

상담사가 환하게 웃으며 그러시군요. 한다. '자유'님 덕분에 제 마음도 편안해지네요.라고 덧붙여 준다. 지선은 나중에 말하면 속절없이 또 눈물이 날 것 같아 그 다음을 이어 말한다.

- 음... 저는 '은하수'입니다. 속상할 때 하늘을 자주 봤는데 밝은 낮보다 밤하늘이 더 마음을 편하게 해서요. 그냥 좀 편하게 살고 싶어서 정했어요.

- '은하수'님, 모습과 너무 잘 어울려요. 반짝거리네요."

지선 왼편 발랄하게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넘기며 주시한 그녀가 웃으며 말한다. 목소리가 밝고 기운차다.

- 안녕하세요. 너무 반갑습니다. 저는 이 채널 너무 좋아하거든요. 저주 가족이라는 채널 이름이 완전 제 스타일입니다. 저는 '나'입니다. 그냥 나 자신으로 늘 살고 싶어서 정했네요."

- 너무 좋은데요. '나'라니.. 힘이 나는 거 같은데요. 하하하.. 마지막 분 말씀하실까요?"

지선 건너편 마지막 사람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렸다.

- 저는...' 나무'입니다. 나무처럼 말없이 조용히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해서요. 

- 많이 떨리시네요. 그러실 것 같아요. 낯선 사람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쉽지 않죠. 용기를 내신 여러분들을 응원합니다.     

자연스럽게 모두 박수를 치고 도영도 박수를 친다. 도영과 눈이 마주치자 지선은 순간 오늘 출발이 좋다고 생각한다.

- 오늘은 소확혐 시간입니다. 소확혐은 소소하지만 나쁜 기억이라는 뜻이고요. 최연호 교수님이 먼저 쓰신 단어인데 인상 깊어서 제가 자주 써요. 부모님을 통해 소소하게 혹은 크게 각인된 기억을 떠올리고 서로 말을 나누며 공감하고 이해하다 보면 어느새 좋은 기억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각자의 기억을 들어보고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하는 상담사의 말이 끝나자  ' 나'가 먼저 말을 시작한다.

- 저는 별로 나쁜 기억은 없어요. 부모님은 충분히 이혼 이유 과정을 다 설명해 주셨고요. 사과도 충분히 하시고 저는 용돈을 각자 주셔서 더 좋기도 했고요. 그냥 부모님보다는 친척들이 특히 고모랑 친할머니가 엄마 욕을 엄청 했는데 그게 너무 싫었죠. 살다 보면 헤어질 수 있지 않나 생각했고요. 지금도 엄마랑 아빠는 각자 재혼도 안 했고 외동이라 그런지 늘 지원도 많이 받았어요.

지선은 순간 마음에서 '나'의 말에 늘 당당했던 그래서 주눅이 들었던 미정 얼굴이 떠오르면서 치밀어 올랐지만 다른 사람들의 미세한 얼굴 변화를 살피던 상담사가 말을 이어받았다.

- '나'님은 그러시군요. 주변에서 어른들이 어른답지 못한 말들을 많이 하죠. 아이 마음은 모른 채 말이죠.

'자유'가 이어서 말을 한다.

- 맞아요. 저도 그런 말들 싫어서 이혼한 사실 주변에 거의 말을 안 했어요. 수치스럽고 집이 싫었죠. 지방에서 살았는데 서울로 진학한 것도 그것 때문이고. 숨기니 뭐 속상하진 않았죠. 지금도 잘 말 안 해요. 아 최근에 전 남자친구 어머네가 엄마가 없어서 네가 그렇다. 뭐 이런 말 듣고 열받긴 했죠. 말보다는 상황이 싫었죠. 제가 학교 다닐 땐 학생 인권 개념이 없어서인지 한 부모 가정 지원 관련 고지서 이런 거 담임 선생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애들 보는 앞에서 주고 이랬거든요.

 지선은 자신이 겪은 일과 똑같은 상황에 분노가 치밀었고 한편 나만 겪은 외로움이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어이가 없고 화도 나고 복잡한 심경이 된다. 

- 아 맞다. 다른 말이 많았네요. 어릴 때 아버지가 엄마를 많이 때리셨어요. 큰딸이라고 저는 안 때렸고 동생을 좀 때렸죠. 엄마는 끝까지 저희를 보호하려고 했고 이혼을 안 하려 했어요. 제가 이혼하라고 말해서 이혼했고요. 속이 좀 시원했어요. 아빠는 그 뒤로 알코올 중독으로 돌아가셨어요. 사실 지금 좀 편해요. 제가 나쁜 사람 같지만요.

-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그 긴 세월 무슨 힘으로 그 어린아이가 견뎠을까요?

자유는 상담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울었다. 상담사는 조용히 계속 지켜보았다. 지선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이래도 되는 것인지 두려움도 생긴다. 차분히 들으려 하지만 계속 나쁜 기억들이 생생하게 지선을 휘감는다. 

건너편 '나무'가 결심한 듯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한다.

- 저는 아빠가 그리워요. 뭔가 죄송한데... 이혼 후 엄마는 저와 동생에 대한 집착이 너무 심했어요. 아빠 없는 집 아이라는 말을 들었느니 바로 이사하고 제 모든 일에 감시했죠. 아빠가 바람나셨는데 욕도 매일 했고 지금도 너무 힘들어요. 엄마는 어른이 된 저한테도 여전히 많은 걸 요구하세요. 이혼 때문에 엄마는 저를 아무것도 못하게 해요.

- 저런.. 어머니 한번 제가 봬야겠네요. 혼 좀 나셔야겠어요. 나무님의 그 마음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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