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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 off Aug 28. 2024

풍선노도의 시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 지선, 지선 우리 오늘 뭐 먹지? 나 살 빼야 하는데... 샐러드 먹으까아?아님 연어 포케 어때? 나 쿠폰 있지요. 너 진짜 부럽다. 말라서. 너 살쪄본 적 없지? 아 진심 부럽다."

- 아닌데. 중학교 때 78킬로까지 찍었지 아마. 수연. 너 이뻐. 다이어트 안돼. 내가 좋아하는 몸이야."

- 와. 대박. 어떻게 뺀 건데 알려줘. 그리고 네가 내 몸 좋아하는 건 하등 필요가 없네요. 지선 씨 "

- 그렇지? 그럼 내가 남자들한테 양보할게. 네가 날 거부하니. 음... 운동?"

- 그렇구나. 난 이번 생엔 안되겠다. 곱창전골 먹으러 가자. 샐러드는 무슨"

지선은 풀이 죽었다가 금세 고운 표정으로 피어오르는 수연이 싱그럽다고 느낀다. 입사 후 6년을 봐온 수연은 잘 먹고 잘 자고 자기 몸을 사랑했다. 지선은 늘 수연이 모든 면에서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자신은 여전히 강박적으로 자신의 몸에 집착하고 살이 찌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전전긍긍한다. 지선은 수연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사랑스러워 눈길이 갔다. 지선은 지금도 수연이 신입 교육 기간에 먼저 같은 조 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이 최고 행운이라 생각한다.

- 근데 지선, 너 정섭씨랑 언제 결혼하는 거야? "

- 사귀면 다 결혼해?"

- 오 얘 봐라. 정섭 씨는 너 엄청 사랑하던데. 항상 너한테 최선이잖아. 집안도 좋고 그 정도면 직업도 미모도 나쁘지 않지?"

- 최선이긴 한데 최적은 아닌가 봐. 내가 그 집안에서는

- 무슨 일 있구나. 걔 엄마가 이상하구나. 말 안 해도 알겠네. 정섭 씨는 네가 첫사랑이네 뭐네 하더니. 어이가 없다. 아니다. 그만 말하자. 신성한 곱창 먹으러 가는데"

지선은 정섭이 자신을 첫사랑이라고 하는 이유는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했다. 정섭은 어떤 경우에도 본인의 감정과 결정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대방 마음과 상관없이 본인 감정에 확신이 들면 그렇게 믿고 집중한다. 처음에 고백했을 땐 그래서 부담스러웠고 차츰 그 성격에 사로잡혔고 사랑했으나 지금은 회피하고 싶다.

'첫사랑은 모르겠고 첫 만남은 절대 잊을 수 없지.'

지선은 정섭이 이제는 자신에게 걸었던 본인 위주의 마음들을 거두어 가길 바랐다.

- 야 김지선. 뭐냐? 너. 코끼리냐?

중학교 3학년 때 정섭이 초등학교 졸업 후 3년 만에 만나 지선에게 한 첫 마디였다. 지선의 동네 산비탈이 아닌 평지에 살았던 정섭은 초등학교 때 지선 주위를 맴돌며 노래를 잘한다고 했다가 머리를 더 기를 생각이 없냐고 했다가 옷 좀 예쁘게 입으라는 둥 간섭을 했었다. 복도에서 정섭이 지선을 놀리면 은수는 웃으며 항상 정섭 손을 잡거나 입을 막거나 해서 지선을 안심시켰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한동안 지선은 정섭을 볼 수 없었는데 지선은 하교 후 은수와 아지트에서 있거나 집 밖을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 친구들을 사귈 시간도 없고 마음도 없었다. 하교 후 동생들 숙제를 봐주고 청소나 빨래를 하면 나가서 놀 시간이 없었다. 지선은 힘들면 뭐든 먹고 잠만 잤다. 공부는 했다.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가야 하니까.

'이 집구석을 나가야 해'

중학교 시절, 지선은 스스로 마음은 풀이 죽고 몸은 부풀어 올라 '풍선 노도의 시기'라고 스스로 이름 지었다. 질풍노도라고 하기에는 무기력했고 답답했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밉상스러운 정섭이 그것을 확인해 주었다. 지선은 묘하게 웃으며 도망가는 정섭을 미워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 딸 잘할 수 있지. 네가 잘해야 동생들이 잘 크지. 엄마 대신인 거 알지? 집 잘 봐"

또 어디를 가는지 지겨운 당부 말을 남기고 아빠는 사라진다. 지선은 예라고 대답하고 팔에 화상 흉터를 한참 본다. 아빠가 지선을 사랑하고 엄마를 가족으로 여겼던 유일한 흔적이다. 아빠도 한때 엄마를 사랑했고 딸인 나를 다정하게 돌봤다. 이혼 후 아빠는 자주 한숨이 깊었고 얼마 후에는 한숨을 들을 수도 없었다.

아빠 부탁으로 반찬을 해다 나르는 고모는 오늘도 같은 말을 반복한다.

- 너 어릴 때 아빠가 너를 첫딸이라고 어찌나 이뻐하던지 늘 오토바이에 태우고 다녔다니깐. 그러다 사고가 나서 네가 화상을 입었잖아. 그때 네 아빠가 어찌나 울던지. 딸 바보잖아. "

지선은 그냥 바보겠지라고 말하려다 참는다. 지선은 초등학교 때는 바보같이 팔에 있는 흉터를 긴 옷으로 굳이 가리지 않았다. 고모 말을 들으면서 젊은 아빠가 자신을 태우고 바람을 가르며 다녔을 길들을 상상했고 사랑받았다는 느낌에 자주 우쭐하기도 했다. 지금도 아빠 사랑의 유일한 증거는 흉터였다. 지선은 이제 반팔 옷을 입지 않는다. 하복을 입고도 반드시 체육복을 위에 입었다.

'더워도 어쩔 수 없어.'

이혼 후 아빠는 오토바이 대신 차를 운전했고 자식들 대신 여자를 태우고 돌아다니기 바빴다. 아빠는 1번 새엄마를 중 1 때 데려와서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 아빠는 집 근처에 빌라 월세를 얻어 1번과 살았다. 2번은 고1 때 만났다. 지선은 1번과 그러 저러 지냈다. 눈치껏 적당히 행동하면 살림을 해주고 반찬을 해주기도 했기에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고 다짐했고 낯선 관계를 참았다. 그리고 1번이 시시 콜콜 말하는 걸 좋아했는데 처음엔 싫었지만 나름 농담도 잘해서 몇 개월은 덜 외롭기도 했다. 지선은 이상한 인연이 된 여자들과 그럭저럭 지냈는데 스스로 어른스럽고 나름 내 입장에 맞는 계산 속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합리화를 한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집에 늘 손님이 온 기분이기도 했고 마지막 자존심으로 같이 쇼핑을 가거나 목욕탕을 가는 것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아빠와의 사랑이 유효기간이 끝나면 그렇게 다 어디론가 가버리고 지선은 동생들과 남았다. 지선은 떠나버린 친엄마를 생각하다 잠이 들면 다음 날 코끼리가 머리 위에 앉아 있나 싶을 정도로 머리가 묵직했다. 이 집에 살던 여자들은 전부 떠나는 데 자신도 떠나야겠다는 희망을 품어보기도 했다.               

지선은 복잡한 감정들이 매일 들이닥쳐 학교에서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은수가 없어 복도에서 창밖을 보는 시간이 길었다. 새로운 친구들과 무언가 주고받고 시간을 들여 용서하고 속 사정을 살피고 할 여유가 없었다. 집이 점점 낯설고 자신이 잘해야 하고 부모가 밉고 그립고 동시에 일어나는 수많은 마음들 때문에 또래 친구들이 하는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아끼고 사랑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불편하고 어색한 것이었고 혼자 있으면 또 외로웠고 공허했다.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손을 놓아야 하는 적당한 때를 알지 못했고 공감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우지 못해 침묵했다.

'이럴 때, 엄마에게 물어보면 괜찮았을까?' 앞에 앉은 아이 뒤통수를 보며 문득 궁금하다.

중3 어느 날. 회색 운동복 말고는 죄다 옷이 작다. 갑자기 울컥 큰 덩어리가 지선 목에 걸린다. 크게 한숨을 쉰다. 중학생이 되고 동생들을 챙기고 아빠는 점점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식탁 위 만원 지폐 몇 장이 아빠 존재를 알린다.

- 누나. 한숨 쉬지 마. 힘내. 나 배고파. 라면 먹을래

큰 동생이 살짝 눈치를 살피는 것이 뻔히 보인다. 그래 함 내차, 지선 목에 올라왔던 큰 덩어리가 살짝 내려간다.

- 그래, 라면 먹자."

지선은 동생과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도 허전하다. 몸이 점점 부풀고 있지만 마음은 쪼그라들어 버린 건지 뭘 먹어도 허전하다.

'은수를 불러내서 아이스크림 사 먹으러 가야지'

골목 아래 편의점에서 은수는 스크류바를 지선은 월드콘을 골라 나오려던 찰나 정섭을 마주쳤다. 은수가 한 발짝 다가가 묻는다.

-너 여기 무슨 일이냐. 

- 어. 은수 안녕. 학교에서는 잘 못봤는데..그냥 담배 사러? 하하. 어. 지선이네. "

지선은 그때 아이스크림에 집중하느라 정섭이 반갑지만 실망하는 표정을 보지 못했고 은수만 보았다.

- 너 진짜 졸라 뚱뚱해졌다. 코끼리냐.  

정섭은 은수를 향해 비아냥 거린다.

- 너네 사귀냐? 

은수 표정을 살피던 정섭은 지선에게 씩 웃더니 도망을 친다. 은수는 정섭을 따라가려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지선을 발견한다. 은수는 지선을 잡아 끌고 올라오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잠깐만

은수가 자기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황급히 나온다.

- 이제 몸에 안 좋으니 사과 먹어. 이제 편의점 가지 말자."

지선은 사과가 든 봉지를 한 참 들여다 본다. 수치스럽고 억울하고 분하지만 정섭의 목소리가 계속 재생된다.     

- 아 나 왜 이렇게 되었지.

지선은 은수가 준 봉지를 식탁에 올려두고 저울에 오른다. 정섭의 눈이 같이 저울을 보는 듯해서 얼른 내려온다. 그날 이후 지선은 계속 은수에게 묻는다.

- 나 코끼리 같아?살빼야겠어.

- 나랑 같이 운동하자. 괜찮아. 너 예뻐. 누가 뭐라고 하든 너 괜찮다고. 예쁘다고.

- 아니야. 너 나랑 친하니깐 그렇지. 이제 나 살 뺄 거야.

지선은 굶기 시작한다. 은수는 계속 굶지 말라고 과일도 챙겨주고 운동도 같이 해준다. 은수가 있어 괜찮았다. 지선은 학교에 친구가 없었지만 은수와 아지트에서 지내다 보면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에 가면 괜찮을 것 같았다. 새롭게 출발하면 된다.     

'지금은 은수가 있고 다 괜찮다.'     

자식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다. 부모 중에는 자식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거울 속 본인 눈만 응시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부모가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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