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 시점
은수는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골목 끝 벽을 기어올라 축대 기둥을 사다리 삼아 내려가서 폐건물로 숨어들었다. 이사로 전학을 하긴 했지만 숨을 곳이 생겨 이 동네가 나름 편안하다. 이전에 살던 집들은 엄마가 할매를 부르며 기도를 드리고 소금을 뿌리고 매운 향을 태우면 숨을 곳도 없고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은수는 축대 기둥을 타고 내려와 작은 마당을 가로지른다. 무성한 풀들 사이로 길이 나있었는데 누군가가 오기는 하는가 보다 생각하며 문을 열고 탁구대가 놓인 건물 안으로 조심히 들어선다. 공장이 돌아갈 때는 여기는 아마도 휴게 공간이었을 것이다. 이 동네는 산비탈에 집들을 지었다. 이 공장은 은수 집 아래 건물이라 타고 내려오면 건물 옥상에 도착하는 셈이 된다. 건물로 들어가니 탁구대 왼쪽에 아래층으로 난 계단이 있다. 입구는 캄캄하고 깊이를 알 수 없이 아득해 보이는 것이 놀이공원 '귀신의 집' 입구와 흡사하다. 은수는 귀신이 겁나진 않았지만 귀신이 있다고 믿기는 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보이지도 않는 할매와 대화를 나누고 손님들에게 미래를 말해주는 것을 알아버린 뒤부터다.
' 저 아래보다 내방 침대 밑에 귀신이 더 많을걸'
순간 삐걱 소리가 들린다. 생각과 달리 온몸에 오소소 닭살이 돋는다. 진짜 귀신인가 휙 돌아보았다. 시커먼 물체가 점점 다가온다.
- 으악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 손으론 허공을 휘적거린다.
- 저리 가. 저리 가.
- 야 사람이야 눈떠. 하하하
실눈을 살짝 떴다가 여자애를 발견하고 눈이 사탕처럼 커진다. 은수는 이제 귀신을 믿지 않는 대신 귀신을 무서워하는 자신을 눈치챘다. 에잇. 오늘 잠은 다 잤네.
- 안녕. 나 옆집 사는데 친구 하자. 같은 반이잖아.
- 싫어. 근데 어떻게 들어왔냐. 나만 아는 곳인데
- 웃기네. 이 동네 내가 먼저 살았는데.. 이사 온 주제에.. 여기 내 아지트거든. 네가 침략한 거지
은수는 여자애의 당당한 목소리에 살짝 당황했지만 침략이라는 말이 맞나 생각하다가 어색해져 애꿎은 바닥을 발로 찬다. 그리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저기....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너희 엄마 무당이라며?
- 그래서 뭐. 불만이야?
은수는 방어적으로 목소리를 높여보지만 여자애는 미안한 기색은 없다. 학교에서는 엄마가 무당이라는 걸 숨겼다. 어쩌다 엄마가 무당이라는 걸 알게 된 친구들은 동정 혹은 무시로 은수를 대했다. 은수에게 이렇게 대놓고 엄마가 무당이냐고 묻는 사람은 처음이고 표정 변화도 없는 경우는 또 처음이라 목소리를 높인 자신이 민망했다.
- 내가 찾아봤지. 무당은 미래를 알려준다던데... 우리 아빠 언제 죽는지 알 수도 있나. 아니다. 아빠보다 내가 먼저 죽을 수도 있겠지?
은수는 순간 놀랐지만 이런 말은 왜 하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가 정신이 나갔나 생각도 들었다가 혼란스럽다. 정신이 나갔다고 하기엔 눈이 멀쩡하다. 친하게 지내지 말아야지. 이상해 이런 생각을 한참 하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 사라졌다. 앞을 보니 여자애가 입구를 나가고 있다. 여자애가 뒤를 돌아본다.
- 나 간다.
가든지 말든지 하려고 하던 찰나 아래층에서 소리가 들린다. 은수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며 얼른 일어난다.
- 같이 가
타고 내려온 벽이 이렇게 높았나? 은수는 담벼락 깨진 틈을 잡고 오르려고 손가락에 힘을 줘 보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지켜보던 지선이 한 쪽 발을 디디고 긴 손을 뻗어 벽 한 쪽 틈을 잡더니 재빨리 담을 오른다. 지선은 손을 내민다. 은수는 머뭇거리다 손을 잡는다. 지선의 손은 은수 손보다 조금 작다. 은수는 손을 잡고 올려다 보다 부끄러워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뒤 발에 힘을 준다. 은수는 무사히 골목으로 내려와서 운동화로 바닥을 차며 묻는다.
- 너 이름은 뭐야?
지선과 은수는 학교를 마치면 약속하지 않아도 담벼락 축대 기둥을 따라 내려가 놀았다. 낡은 탁구대에서 라면 박스를 잘라 탁구를 치기도 하고 숙제도 같이 했으며 노래도 함께 불렀다. 은수는 지선 엄마가 집을 나가고 자주 울 때도, 지선의 손목에 엄마랑 같은 상처를 발견했을 때도 아지트가 있어 다행이라고, 지선 곁에 자신이 남아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쉽게도 중학교는 같이 다닐 수 없었다. 중학교 하굣길 어느 날, 은수는 동네 슈퍼 앞에서 지선에게 끌려 집으로 왔다. 처음엔 끌려 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지선이 엄하게 애원하는 눈빛을 이길 수 없었다.
- 너 왜 그래? 왜 그렇게 거기 노려보고 있었던 거야? 너 왜 이렇게 화가 났어?
슈퍼 앞에서 아줌마들이 하던 말을 지선에게 옮기고 싶지 않았다.
은수가 하굣길에 슈퍼에서 나오는 지선 아빠를 보았다. 지선 아빠가 라면을 사고 친절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슈퍼 앞 간이 테이블에 아주머니 세 분이 수다를 떨며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 입을 대는 중이었다.
" 지선 아빠는 얌전히 삼 남매 키우며 살잖아. 대단하지 않아. 여자가 집을 나가도 저렇게 성실하다니깐. 근데 그 무당집 그 년은 꼬리나 살살 치고. 정말 웃기지도 않아서.”
은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지선 아빠는 아이들을 늘 방치하고 살림은 착한 지선이가 다하고 있는 데 무엇이 대단한지, 우리 엄마는 나를 버리지도 않고 아빠없이 키우는 데 왜 욕을 먹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은수는 먹던 콜라캔을 거머쥐며 아줌마들 면상에 뿌리고 싶어진다. 은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눈을 슬슬 피하며 아줌마들이 수군댄다. 은수가 입을 떼려는 순간 지선이 팔을 잡고 끌어내버린 것이다.
은수는 한참을 끌려가다 웃음이 난다. 분해서 인 것 같기도 하고 잡힌 손이 따뜻해서 인 것도 같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선은 은수에게 늘 손을 내민다. 은수는 지선에게 끌려가다 다리에 힘을 주어 멈춘다. 지선의 팽팽하던 팔이 뒤로 확 당겨진다. 이제 은수가 지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 지선이 은수 팔을 놓고 은수를 지긋하게 엄마처럼 바라본다.
“맞어, 사실 그 아줌마들 혼 좀 나야 해. 니 맘 알지” 왜 혼을 내고 싶은지 물을 자신이 없다.
은수는 캐묻지 않는 지선이 고맙지만 조금 더 물어보면 엉엉 울며 어린애처럼 모든 서러움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도 들어 당황스럽다. 요즘 지선을 보면 상반된 마음들이 싸운다.
은수 눈이 점점 붉어진다. 은수는 불쑥 올라오는 마음들을 잠재우려 고개를 들어 골목 안쪽을 바라본다.
“잘했어. 잘했어. 잘 참았어”
은수는 울려다가 웃는다. 또 마음이 이상하다. 오늘은 진짜 이상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