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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Aug 21. 2024

저주 가족

'저런 엄마라도 있었으면'

 왜 속상한 순간에도 행복해 보이는 부모 자식 관계에 대한 수치스러운 동경은 지선이 켜켜이 쌓아 올린 결심을 비집고 쳐들어 오는가? 지선은 다가오는 모든 시간도 절망이 쌓여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을 생생하게 느낀다. 정섭 엄마는 지선을 처음 봤을 때 정섭이 예약한 식당 인테리어를 칭찬하면서도 웃지 않는 눈으로 그만하면 능력 있겠네라며 말을 흐렸었다. 하지만 지선은 얼마 후 결혼 말이 오고 가면서 부모의 이혼을 알리며 돌변하는 얼굴을 무방비로 지켜봐야 했다. 지선은 내심 잘 컸구나, 그동안 고생했네 하는 다독거림은 기대하지 않았고 동정심 정도로 마무리될 줄 알았다.  사실 돌변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거기다 어처구니 없이도 인간 이하의 몰상식한 반응과 지 자식만 귀하다는 왜곡된 사랑을 두고 '부러움'이라니....


지선은 자신에게서 30대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모순된 양가감정에 휩싸여 답답하게 슬프게 살아가는지 답을 얻고 싶었다. 지선은 무엇보다 홀가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부모 이혼 후에 늘 '감당'이라는 큰 짐을 지고 살면서 가져본 적 없는 '자유'를 희망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했다. 부모가 버렸음을 감당하고 받아들이면 될걸 자주 분노했으며 분노하고 완전히 버리면 될 것을 미련을 부렸다. 자유롭지 못해 자주 망가졌다.


이번엔 작정을 하고 어떻게든 마음이 조금이라도 기울어진 쪽으로 '선택'이라는 것을 하기로 한다. 아들이 사랑한다는 여자를 두고 작심하고 저주하는 인성 밑바닥을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감당하지 않겠다'라는 쪽으로 내면의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지선은 한편으로 정섭을 향한 저 엄마의 극성과 관심, 애정 어린 눈빛의 색과 질감, 밀도가 궁금하기도 하다. '아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명분하에 지선을 기타 등등으로 취급하는 비겁한 말을 충실히 하는 것은 인간인가. 저렇게 저질이라면 영원히 모르는 것도 좋겠지' 지선은 몸서리를 치며 싫어한다. 오기와 독기를 끌어모아 이해 대신 동경 대신 싫어하기로 마음먹는다.


' 그래. 정섭 엄마 말처럼 엄마 없이 자라서겠지.'

' 저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가 얄팍하게 정섭 뒤에 숨어 가족을 등지려는 내 속셈을 귀신같이 아는 건가.'

지선은 이러다 정섭과 결혼을 하면 삶 전체에 저주가 뒤범벅될 것 같은 묵직한 기분이 된다.


지선은 지난 1년 동안 퇴근 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질어진 정섭 엄마와 중간에서 어쩔 줄 모르는 정섭, 지선에 대한 질투를 숨기기 위해 비겁하게 지선 부원을 괴롭히는 직속 부장을 생각하면 누가 머리채를 잡아 물이 가득한 욕조에 처박는듯한 숨 막히는 모욕감을 느꼈다. 지선은 참고 아닌척하는데 익숙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욕망을 가감 없이 봐버린 후 발밑에서 올라오는 정체 모를 분노를 삭히느라 웃음을 가장하느라 점점 지쳐갔다.

지선은 어디서 무엇을 통해 마음을 추슬러야 할지 위로를 얻을지 충고를 들을지 결정할 수 없었다. 여러 갈래로 만들어진 인간관계의 길을 알지 못했다. 그럴수록 엄마는 나를 버렸고 방치한 아빠도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결말만 떠올랐다. 가족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끝을 정하지 못한 질문들만이 마음에 구멍을 크게 만들었다.


지선은 사람이 아닌 영상에서 간섭 없는 위로를 받았다. 지선의 재산 중 텔레비전이 제일 비싼 이유다. 큰 화면으로 유튜브든 넷플릭스든 영상을 보는 시간이 유일하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시간이 되었다. 멍하니 돌아가는 영상을 보는 동안은 속 시끄러운 머리가 잠시 멈춘다.

지선은 문득 배가 고파 배달 온 도시락을 하나 꺼내고 윤아가 톡으로 보낸 유튜브 채널을 검색한다.

' 이 채널 보다가 네 생각이 났어. 꼭 봐.' 지선은 비건 마파두부 도시락 뚜껑을 열며 고기 좀 먹으라는 잔소리가 귀에 들려 옅은 미소를 짓는다.  


채널명 '저주 가족', 소개 글은 '저는 가족을 저주하고 가족을 버립니다.

지선은 여기 또 관심받고 싶어 안달 난 나 같은 사람이 있구먼 하면서 쯧 소리를 낸다. 지선은 동영상 목록을 한참 훑어본다. 섬네일을 보다가 풋 하고 웃다 사레가 들려서 냉장고에 가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부모님 이혼 후 용돈 두 배 정당한가', ' 담임한테 부모 이혼을 말하는 것이 유리한가', '실험 카메라 : 절친에게 부모 이혼을 말했을 때 반응' 등  섬네일 제목에 맥주를 시원하게 크게 한 모금 했다. 오랜만에 크게 웃기도 한다.

댓글에 후레자식부터 육두문자, 응원한다, 속이 후련하다, 네가 내 아비다 등 반응이 엄청 달려있었다. 큭큭거리는 자신이 낯설다.


지선은 '이혼 가정이라고 결혼을 반대합니다'라는 영상에 스크롤을 멈추고 망설이다 재생 버튼을 누른다.


" 제가 이혼 당사자도 아닌데 기분 나쁜 소리를 너무 많이 하더라고요. 참다가 어이가 없어서 당연 헤어졌죠. 가장 결정적인 말은 아무래도 제가 엄마 없이 커서 결핍이 있어서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을 거라나 뭐라나. 평소에도 집에 들르면 피곤해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래 어쩐지 애가 어두운 구석이 있다. 이런 말들도 함부로 했죠. 사실 한국에 문제없는 가정이 있나요?"


지선은 모자이크 처리된 여자의 흐릿한 모습에도 서럽고 울컥하는 분노가 뒤섞인 단호한 표정을 보는듯했다. 정섭이 쉽게 하던 다짐들이 자잘하게 쪼개져 위 속에 박혔는지 도시락은 절반도 먹지 못했다. 지선은 남은 맥주를 마시고 다시 한 캔을 더 꺼내기 위해 일어나 고개는 영상에 고정한 채 냉장고로 향한다.


"시원하게 싸우고 시원하게 뒤돌아섰죠. 후회는 없어요. 오히려 제가 저를 구했다고 생각해요."


지선은 화면을 응시하며 시원하게 두 번째 캔을 딴다. 두 모금을 마시고 결심한 듯 핸드폰을 꺼내 '저주 가족'채널명 아래에 달린 구글 설문에 접속한다.' 이혼한 집, 자녀 인터뷰 모집' 설문에 지선은 이름을 입력했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입력하려는 순간 액정에 정섭의 번호가 선명하게 화면을 장악한다. 지선은 액정에서 거절을 힘껏 눌러 매몰차게 밀어버리고 설문에 결심이 사라지기 전에 재빠르게 응답하고 제출 버튼을 시원하게 눌러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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