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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 off Sep 18. 2024

정당한 '저항'

은수

지선은 자기도 모르게 계속 눈물이 났고 심지어는 옆 사람 손을 잡았다. 평소의 지선은 이런 행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아프게 알아볼 때 생기는 일일까

상담사는 나쁜 기억이 쌓이면 트라우마가 되며 이 트라우마는 모든 상황에서 트리거가 되어 어른이 된 후에도 괴롭히며 그 기억을 직면하고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보는 것만으로도 후련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지선은 이상하게 후련하면서도 동시에 찜찜했다. '나'님의 상황과 자신의 상황이 비교되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우리 부모는 사과를 하지 않는지, 이혼을 왜 하게 된 건지 전혀 설명이 없었다는 사실에 분노가 일었다.

- 특히 자녀 서열 상 첫째들이 고통이 심할 수 있죠. 이혼 후 첫째가 대리 배우자 역할을 많이 수행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 아이가 어른이 되죠. 여전히 자신은 어린아이이데 말이죠.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우셨든 겁니다. 그 마음에 머물러 보세요. 자신을 다독거려 주세요.

지선은 상담사가 시키는 대로 팔을 교차하여 자신의 어깨들 토닥거려 본다. 다 큰 성인 여자들이 모여서 하는 행동들이 어색하고 부끄럽기도 한데 분노가 조금은 진정되어 신기하기도 하다. 녹화는 80분가량 진행되었는데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벅찬 기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괴롭고 찜찜하기도 했다. 지선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해 본 적이 처음이다. 늘 얼굴에 가면을 쓰고 괜찮은 척하는 것이 지선다웠다.

- 저랑 만나는 동안 계속 마음이 좋기도 하다가 불편하기도 하실 겁니다. 저랑 이야기하실 때 뭐든 이야기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불편한 마음이 올라오면 그 마음을 잘 살피시길 바라요. 불편함이 가리키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거든요. 제가 여러분들께 바라는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불편함에 직면하세요. 여러분의 소확혐을 소확행이 될 수 있도록 제가 도울게요. 최선을 다해서. 

지선은 그날.. 처음으로 남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해주는 튼튼하게 버티는 어른을 만났다. 은수가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지선은 조용히 길게 울었다. 일주일 뒤, 기쁘면서도 서러운 이 마음을 설명하고 싶은 조바심이 크게 자라고 있었다.      

물을 먹은 비누가 흐물거리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평소라면 버리고 단단한 새 비누를 꺼내서 썼을 테지만 묽어진 비누를 조물 딱 거 린다. 지선은 손을 씻으며 퍼지는 허브향에 머릿속이 비누처럼 풀어진다. 느슨하게 만나 마음을 나눈다라... 상담사가 모임 끝에 말한 느슨한 연대가 썩 마음에 든다. 지선은 첫 모임 상담사가 제안한 나쁜 기억 꺼내기에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며 엄마가 집을 나가고 아빠가 여러 여자를 만난 이야기를 했었다.  수치스러워 숨기고 싶던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고 나무님의 솔직함에 용기를 내어 이야기했었다.  또한 그날 우리 모두는 피해자라는 사실과 이해와 응원을 위한 말과 눈빛들에 더듬더듬 눈물을 지우며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모두 첫째 딸이라는 공통점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막상 입 밖으로 나온 기억은 상처가 아닌 운이 없어 벌어진 사건이 되었다.     

지선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고 긴장 없이 풀어진 마음으로 출근을 한다. 다음 촬영까지 일주일을 기다리는 일은 지루하지도 지겹지도 않았다. 두 번째 녹화날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지선이 가장 먼저였고 도영은 책을 보는 중이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고 지선은 그 순간 설렜다. 도영이 고개를 들어 지선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그것만으로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지선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어 사람들이 모이고 촬영이 시작되었다.

- 오늘은 조금 더 나아가보도록 할게요. 오늘은 부모님 이혼이 내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볼까 합니다. 부모의 이혼은 부정하고 싶지만 아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일단 여러분이 지금 힘든 건 너무도  당여 한 일이죠. 하지만, 어떤 일도 일어나는 것이 삶이지만 '어떻게' 수용할 것이 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죠. 그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네요. 뭐든 편안하게 생각나는 이야기를 하시면 좋겠어요.

지선은 늘 자신이 못나서 아빠 요구에 질질 끌려간다고 생각했는데 상담사가 힘든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된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자유'였다.

- 전 만나던 남자들 말을 대부분 들어줬어요. 아니 참았죠. 늘 을의 입장이 되었다고 할까요? 을이 마음 편했어요. 어릴 때부터 늘 마음에 큰 구멍이 난 상태였고 남자를 만나면 좀 채워졌고 헤어지면 또 혼자가 되니깐 대부분 맞췄어요. 쓰레기들도 만났던 것 같아요. 한 번은 남자 친구에게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간 적이 있어요. 

지선은 놀라면서도 대학시절을 떠올리며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대학교 때 미정을 따라다니며 늘 남자를 만났다. 한순간도 혼자이고 싶지 않았다. 남자를 오래 붙잡아 둘 방법을 찾았고 최대한 착한 여자로 연기를 했다. 하지만 상대도 지선도 만족할 수 없었다.

- 그러셨군요. 자유님께 일어난 일은 부모님의 이혼과 관련 있을까요?

- 글쎄요. 잠시만요. 하하하.. 분해서 눈물이 나네요. 아버지가 싫고 밉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남자를 자꾸 만났어요. 외로운 그 상태가 싫었던 것 같고. 늘 주도권도 남자에게 있었고 늘 참았죠. 버려질까 봐.

- 참느라 힘드셨겠어요. 버려질까 봐 두렸웠다는 말에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지금은 헤어지셨나요?

- 네.... 머리채 잡힌 날 아이러니하게도 고맙더라고요. 정신이 바짝 들었어요. 관계를 끝내기도 쉬웠고. 그게 빌미가 되었거든요. 그리고 상담을 받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지선은 자유의 말에 정섭 얼굴이 떠오르며 속이 울렁거렸다. 무례한 정섭 엄마와 쩔쩔 메는 정섭이 겹치며 눈앞이 흐려진다. 상담사는 자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잘하셨어요 한다. 그리고 긴 침묵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며 표정 하나하나를 살펴준다. 이내, 주저하던 '나무'가 입을 열었다.

- 지금도 엄마말이 귀에 늘 들려요. 엄마는 뭐든 잘못하면 제 탓을 많이 했죠. 너를 나아서 내 신세가 이렇다. 그때 너를 낳지 말아야 해. 이런 말들이요. 그러면서도 또 늘 공부도 잘해야 하고 좋은 회사 취업해야 한다고 강요해요.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공부했고 착하게 살았죠. 그 사실이 숨이 막히고....

나무는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 저런.. 이런 경우들이 많죠. 이혼 후 첫째 자녀에게 배우자 역할을 하게 하는 투사가 많이 일어나죠. 부모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고요. 어떻게 본인을 지키셨을까요. 나무님     

지선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생각이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대학 진학 후 지선은 공허함을 주체할 수 없어 은수를 멀리했고 정은은 스펙을 쌓느라 바빠 보였고 지선은 외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미정은 여전히 지선을 들러리로 이용했지만 돈 많고 남자 많은 미정 주변에서 여러 남자를 전전하며 방탕하게 지냈다. 그러다 정섭을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처음 정섭은 지선을 몰라봤다.

-와. 너 진짜 지선이냐. 왜 이렇게 이뻐진 거야. 몰라보겠다. 암튼 번호 줘. 

정섭은 여전히 잘났고 오만해 보였다. 지선은 처음에는 중학교 때 외모를 평가하던 정섭이 생각나 피해 다녔다. 정섭은 오히려 그런 지선에게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정섭은 끈질기게 다가왔고 사귀게 되었다. 정섭을 생각하다 돌연, 상담사가 나무에게 집중하는 상황에 기분이 나빠졌다. 아빠가 오랜만에 우리 집에 놀러 온 사촌 언니에게 잘해주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날 지선은 속이 부글부글 했었다. 자기 자식들은 한 번도 다정하지 않았으면서 사촌언니에게 다정한 아빠가 너무 더럽게 느껴졌다. 질투하는 자신도 너무 수치스러워 그날 지선은 병이 났었다. 그날처럼 불쾌해서 몸이 떨렸다. 상담사가 지선 쪽을 바라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한다.

- 괜찮으세요? 많이 불편해 보이세요.

- 그래도 아빠는 딸이 하나라 저를 사랑했었던 것 같아요..

지선은 '이 말을 왜 하지... 아빠는 나를 사랑했나 그런 적이 없는데....' 순간 목구멍에 단단한 골프공이 박힌 느낌이 들며 정신이 아득하다. 지선은 그대로 아래로 꼬꾸라졌다. 멀리서 도영이 지선을 부르며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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