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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ff Sep 25. 2024

달걀판 속 병아리

죄책감

지선은 응급실에서 병실로 옮겨졌다. 도영이 지선을 당황스럽고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 보호자분.. 환자분이 저혈압이시네요. 충격을 받으셨나. 환자분.. 안정  취하시면 괜찮을 것 같네요.

-지선 씨 괜찮아요?

동시에 병실 문이 열리며 동생과 아빠가 들어선다. 지선 눈에 퍼뜩 그림자가 드리운다.

- 도영 씨 감사해요..... 가보세요. 

- 아 네.... 가족분들 오셨네요.. 그럼 다음에 봐요. 

- 다음은 없어요.

지선은 도영을 향한 날 선 반응에 스스로 순간 당황한다.

- 네 이해해요. 그래도 연락은 주세요.

도영이 조용히 웃으며 병실 문을 닫으며 말한다. 이상하다는 듯 아빠는 도영에게 고개를 까딱하다. 저 남자는 또 이해를 한다고 한다. 도대체 뭐가 이해가 된다는 거지. 내가 불쌍한가. 긴 터널 속에 갇혀 숨을 쉴 수 없는 아득함이 밀려온다.

- 지선아 괜찮아?

지선은 아빠가 자신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위선이라는 생각을 하며 최대한 나쁜 말을 찾아낸다.

- 나가. 나가라고. 아빠가 언제 나 걱정했어 그 여자하테 가시라고요.

- 반항 한번 안 하고 착하더니... 큰 딸. 왜 그래?

- 나 안 착해 누가 착해. 가세요. 아빠가 그렇게 사람 마음도 모르니깐 모두 다 떠나는 거야. 저도 이제 아빠 안 보고 싶어

- 그래 이년아 보지 말자. 지가 돈 좀 번다고 

- 사과해요. 아빠가 다 망친 거야.

- 난 할 만큼 했어. 너희 공부도 시켰고

지선은 머리로 피가 쏠리고 잡은 이불이 들썩이도록 온 몸이 떨린다. 아빠가 지나치게 당당하고 뻔뻔해서 분노가 일렁이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다.

- 뭐라고? 그렇게 우리를 외롭게 힘들게 하고 할 만큼 했다고?

지선은 악다구니를 쓴다. 어처구니 없이 이 모습을 도영이 본다면 수치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더 크게 악을 쓴다.

- 누나 참아. 아빠 지금 당뇨라 몸 많이 안 좋아. 다음에 이야기해.

- 벌 받은거지. 너도 가. 다 나가

지선은 꺽꺽 소리를 내며 운다. 병실 전등이 와르르 쏟아져 팔과 다리, 심장에 촘촘하게 꽂힌다. 몸 구석 구석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흐른다. 지선을 다독이는 은수 목소리가 조용히 들린다.

- 괜찮아... 잘했어... 잘했어...     

지선은 도영에게 연락을 한참 망설이다 다시 전화를 건다. 이 남자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 망설일 일인가. 지선은 그날 이후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없었다. 며칠을 울었고 회사에 연가를 냈다. 몇 날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정섭 번호를 차단했다. 정은이 여러 번 왔지만 지선은 만나지 않았다.

은하수님... 괜찮으시죠? 걱정이 돼서요. 

왈칵 눈물이 났다. 나무님의 톡을 한참 들여다며 지선은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도영에게 전화를 했다.

- 선생님 좀 만나게 해 주세요.

지선은 여름인데도 긴팔을 꺼내 입고 그 위에 바람막이를 걸쳤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한참을 울었다. 선생님을 만나면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 지선 씨.. 용기 내줘서 감사해요.. 

- 선생님 뭐가 잘못된 걸까요. 저 잘해왔거든요. 제가 왜 이럴까요?

지선은 너무 추워 바람막이를 여미고 상담사가 가져다 준 담요로 어깨를 감쌌는데도 떨렸다. 상담사는 조용히 일어나 에어컨을 꺼준다. 따뜻한 물을 권하고 한참을 기다려준다.

- 얼마나 힘드셨어요.

지선은 무엇을 말했는지 어디에서 어떻게 말을 했는지 지금도 모른다. 선생님은 어떤 충고도 하지 않고 지선의 말을 들어주실 뿐이었다. 다만 모든 아픔이 정당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수용했다. '정당하다'는 말이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말이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외로웠구나 생각한다. 

-지선 씨.. 불편한 마음들은 반드시 쓸모가 있다고.. 누구나 스스로를 알아가는 길에 저항을 만납니다. 일종의 자아를 지키기 위한 방패죠. 혹은 방어기제라고 하지요.. 스스로를 지켜가려는 지선 씨의 에너지를 환영해요.

지선은 끝을 모를 긴 긴 고백을 이어간다. 지선은 오랜만에 배가 고팠다.

-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랑 저녁 드실래요?

지선은 후련해져 배가 고픈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 마음에 잠시 머문다. 

- 지선씨. 감사해요. 그런데.. 도영 씨가 여러 번 전화했어요. 도영씨에게 연락해보세요. 

상담사는 환하게 웃으며 지선을 향해 팔을 벌린다. 지선은 조용히 무너진다.

- 저랑 개인 상담을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 네.. 그럴게요. 

상담실을 나와 지선은 복도 긴 의자에 눈을 감고 기대 흘러가는 생각과 말들을 바라본다. 문득 몸을 일으켜 도영에게 어렵게 전화를 한다.

- 도영 씨.... 너무 늦게 연락했죠. 감사했어요.

속절없이 심장이 뛰었지만 머리 속은 차츰 선명해진다.

- 지선씨..다행입니다. 전화 기다렸어요. 지금 스튜디오로 오실래요? 보고 이야기 해요.     

지선이 살아낸 시간은 종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만든 달걀판이었다. 이제 맞이할 시간들은 달걀에서 병아리가 되고 판을 낮추는 노력들로 채워져 갈 것이다. 상담실을 나올 때 들었던 마지막 말을 되내이고 크게 숨을 몰아쉰다.

- 지선 씨 일기를 읽는 내내 마음이 짠하고 아팠어요. 슬픔에 갇힌 아이가 글로 스스로 살아냈더군요. 살아내느라 얼마나 고되었을까요.

지선은 여전히 다독이는 말들에 익숙지 않다. 귀에 익지 않아 불편하지만 속은 말캉거린다.  

'아. 내 일기를 보셨구나...' 지선은 도영이 자신을 도우기로 한 마음이라 안심도 된다. 조금은 불쾌하기도 한가.

일기를 건네던 그날, 도영을 보러 가면서 일기를 챙겨간 이유는 뭐였을까? 처음 읽을 사람이 그이길 바랐다. 그가 길게 걱정해 주길 원해서였다. 일기장 가득 메워진 유치하게 비굴하게 사랑받고자 애썼던 노력을 도영만은 이해할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컸다. 줄 양끝을 잡아당기는듯한 팽팽한 불안을 도영이 중간에서 잡아주길 바랐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도영이 누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안타까웠다. 하지만 설명이 안 되는 기쁜 마음이기도 해서 부끄럽기도 했다.      

- 지선 씨 어렵게 용기를 냈잖아요... 상담사님께 개인 상담을 좀 받아보는 건 어때요?     

도영은 누나를 잃고 슬픔과 분노를 다스르지 못해 방황했던 시절 개인상담을 오래 받았다고 했다. 도영은 손에 쥔 머그컵에 새겨진 '마음 챙김 상담과정'을 말하며 지선을 그저 담담히 바라보았었다. 아닌가 슬픈 표정이었나... 지선은  도영에 대한 호감과 개인 상담의 무게 사이에서 생각이 엉켜 복잡했다.     

- 상실... 알아차리니 나아지더라고요. 제 경우는요.... 지선 씨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말에 지선은 용기를 냈다. 생각에 잠겼던 지선은 다시 상담사를 마주 본다. 

'잘하는 일이겠지... 뭘 말하지...' 한 끼도 먹지 않아서 인지 속이 울렁거린다. 

- 일기가 은수군요. 

지선에게 일기 속 은수는 부모였고 지선 자신이었고 친구였다. 마음속 견고히 쌓아 둔 둑이 슬픈 소리를 내며 균열이 생긴다. 상담사는 재촉하지 않는다. 지선은 도영이 허락 없이 일기를 전한 건 불쾌했지만 도영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 같아 말을 할 용기를 낸다. 

- 어릴 때는 부모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버텼어요. 일기를 적으며 상상했죠. 나를 받아줄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뭐든 적었던 것 같아요. 은수는 제 일기에만 살아있죠

- 그랬군요. 스스로를 돌봤군요. 힘겨웠겠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일기를 쓰지 않았더라고요. 이유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지선 눈 주위가 파르르 떨리며 눈 주변이 발갛게 색이 번진다. 참고 또 참는다.

- 저는요.. 대학교 때. 모두 놓아버리고 싶었어요. 

지선은 술을 마시며 아무 남자나 만나 시간을 보낸 순간들이 떠올라 급격히 외롭고 고되다. 그때부터 일기를 쓰지 않았다. 

- 저는 저 자신을 그때는.. 지금은 아닌데요... 망가뜨리기로 결심했었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통증은 배에서 가슴으로 이어졌다. 

- 그랬군요. 그런 마음이 왜 들었을까요? 

- 집 나간 엄마는 연락이 없었고 아빠는 늘 자기 즐거운 것만 했어요.... 그랬어요.... 언제였지... 입학하고 1학년때 인가 아빠가 서울에 좋은 대학 갔다고 친척들한테 막 자랑을 하는 거예요. 아빠는 해준 것도 없으면서... 정말 미웠어요. 그래서 복수하고 싶었어요. 아빠의 자랑은 절대로 되면 안 된다.... 

- 지금 어떤 마음일까요?

- 수치스럽고 원망스럽고... 전 너무 잘해왔거든요.. 그런데 지금도 이렇다는 게....

- 수치스러웠군요... 아버지에게 그런 말들을 해본 적은 있나요? 

지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참으려던 눈물을 흘렸다.

- 지금까지 피했죠. 두려웠어요. 말하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어요. 그날 기억나시죠? 제가 쓰러진 그날... 말했어요. 아빠를 저주했어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변명만 하는 사람이에요.. 

처음 분노를 아버지에게 퍼부은 날 후련했지만 죄책감이 있었던 마음들과 동생들을 거기 두고 자신만 독립해서 사는 지금이 불안하고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지선은 방향을 잃어가는 자신이 두렵고 막막하다고도 했다.

- 당연히 서운하고 분노가 생기죠. 부모도 완전하지 않아 실수를 하죠. 하지만 거기에 합당한 설명은 늘 해야 해요. 인간대 인간으로... 지선 씨 부모님은 전혀 설명이 없었죠. 오히려 지선 씨가 이해를 하는 입장이죠. 너무나 정당한 분노예요.

정당한 분노일까. 지선은 아빠에게 조금은 친절했어야 했나 죄책감이 일렁인다. 

- 어른이 되고 아빠 처지가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내가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 싶고도 해요.. 제가 말을 한다고 아빠는 변하지 않을 거예요.

- 알지요.. 알아... 원망스럽고 나만 괴로운 그 상황.. 맞아요. 변하지 않지요... 그래도 한 번은 생각해요.. 참지 말고 거듭 말하세요. 설명하세요. 변하진 않지만 말하면 문득문득 지선 씨 말을 떠올립니다. 한 번은 생각하게 되죠. 그리고 말하는 동안 부모는 변하지 않지만 지선 씨는 분명 성장합니다. 지선 씨 마음은 달라지죠.

지선은 사람이라면 아니 부모라면 자식의 고통을 알아차리고 반성하기를 바랐는데 변하지 않는다니 원망스럽고 무기력하다. 그런데 적어도 자신의 마음은 달라진다는 말을 듣고 있으니 책을 읽다가 복잡한 문장을 이해하고 그 장을 넘기는 후련함은 있었다. 

- 부모 잘못으로 만들어진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지선 씨는 외롭게 고립되어 가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흡사 달걀판처럼 말이에요. 누군가를 간절히 찾지만 방어도 해야 하는 상태 같아 보이네요.. 얼마나 외롭나요...

달걀판.... 누군가를 원하면서도 혼자 지내고 있는 자신의 원룸이 보인다. 그리고 쉽게 툭 치면 확 풀어질 달걀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언제쯤 이 고통에서 풀어지게 될까....지선은 아득한 기분이 된다. 

- 지선 씨가 아버지에게 분노한 건 큰 의미예요. 분노는 표현으로 이끌고 표현은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바꿉니다. 격렬한 에너지죠. 그리고 글을 써서 스스로 다독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전 지선 씨의 에너지를 봤어요

상담사는 상담 말미에 분노 표현 뒤에 무엇을 채울지는 오로지 지선의 몫이고 선택이라고 말을 이어갔다. 

- 하지만 이제 죄책감과 수치심은 내려두세요. 

지선은 일어서자 상담사가 팔을 크게 연다. 지선은 얼결에 상담사에게 안긴다. 

분노 뒤에는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 맞을까? 일단 오늘은 조금은 홀가분하네

지선은 배의 통증이 줄어든 걸 확인한다. 지선이 만든 달걀판 벽이 스스로 균열을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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