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되었다. 어느 날 흘러가야 할 시간 중간에 단단하게 끼여버렸다. 이제 좀 행복한가 했는 데 섬뜩하다. 사전에 섬뜩하다는 '갑자기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끔찍하다'라고 해석되어있다. 근데 갑자기였을까. 내 몸은 벌써 지긋이 알고 있다. 검진을 받으면 몸이 알려준다. 지병이라는 것이 생긴다. 당뇨, 고혈압, 고지혈이 정상과 문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중간의 나이처럼 몸과 마음도 옴짝달싹 못하게 갇혀버린 느낌이다. 그렇게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서 오도 가도 못하는 내가 한심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뭐 하고 살았을까.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과제를 허들 넘는 달리기 선수 마냥 뛰어넘었다. 넘다가 넘어져 피도 나고 멍도 들었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달렸다.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내가 만든 여러 가지를 받던 아이든 후배 든 지에게 바통을 넘겨주고 좀 숨을 고르고 싶은데 섬뜩하다. 그들은 바통을 넘겨받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눈길을 스마트폰에 고정하고 다른 데 마음이 가있다. 서럽다. 앞서가던 내 부모는 모든 걸 넘겨버렸는데 정작 내 짐은 혼자 들고 지고 서서 존재가 사라진다. 쉴 수 없으니 점점 숨이 막혀온다. 여유가 없어지니 답답하고 후회가 된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기도 하다. 책임이 돌덩이가 되어 나를 누른다. 이 돌덩이는 노년에 보석이 될지 묘비가 될지 알 수가 없다.
"지진이 샘을 만든다."
니체가 한 말이다. 부서지기 쉽고 후회가 많은 날들이지만 그 불편함이 진짜 내 삶을 찾도록 하는 시원한 물이 되기도 한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는 걸을 선명하게 깨달은 날. 노년을 나답게 살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시작을 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하면 돌을 버리고 가볍게 늙어가지 않을까. 희망적인 것은 이 나이쯤 되면 완전한 행복도 완전한 불행도 없다는 것을 안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급했다. 불편한 섬뜩함을 해결하고 행복해지고 싶어 조바심이 난다. 하루아침에 책 한 권, 강의 한번, 산책으로 가볍게 해결될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서 인지 더 급하다. 내 나이만큼 마음에 시간이 쌓인다. 그 시간 안에는 나를 지켰던 방어기제와 가치관, 생각이 켜켜이 둘러싸여 깊고 넓은 마음을 만들었다. 그래서 여태껏 잘 살아냈다. 힘을 빼고 생각해 보면 도리어 금방 나아지지 않고 의심하고 고민하는 내가 좋기도 하다. 말 한마디, 글귀 하나에 맥없이 좋아진다면 나라는 존재는 새털같이 가볍고 허망한 존재가 아닐까.
요즘은 조급함을 누르고 조금씩 나아지는 쪽으로 마음을 먹는다. 약 10년 정도 마음 돌덩이를 조금씩 던져 버리고 가벼워지면 노년에는 몸만 돌보면 될 것 아닌가. 두려웠던 100세 시대라는 미래도 번쩍 들고는 못가도 질질 끌고는 갈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의 짐을 내리기 위해 심리학 공부를 하고 대학원을 다니고 상담을 했다. 중년 또래들을 만나 독서모임을 한다. 그러면서 조각조각 의미를 이어가고 있다. 많은 영감을 얻기도 하고 안심도 한다. 그 소소한 방법들을 글로 남겨 다 같이 소소하게 행복해하며 늙어가고 싶다.
사는 게 별거가 아닌 것 같아도 별것이다. 마음을 돌보며 몸을 아끼며 '참나'로 살아보고자 한다. 지금 현재 나에게 의미가 있으면 노년에도 의미가 있겠지. 현재를 다지면 그 다진 땅에서 꽃은 자라겠지.
다행히 당신은 혼자라서 우리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