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아침 오랜만에 쾌변을 했다. 시작이 좋다. 빠르게 핸드 드립 해서 향기 좋은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집을 나선다. 웬일로 차가 밀리지 않는다. 부장급 회의에서 소신 있게 말한 것이 먹혀든다. 좋았어.!! 구내식당 나물 반찬도 오늘 썩 마음에 든다. 옆에 앉은 MZ는 돈가스 먹고 싶다고 툴툴거리긴 하지만. 퇴근 무렵 마음에 촛불 하나가 켜지더니 약하지만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간다. 아. 와인 한 잔에 책을 좀 읽어 볼까. 조금은 행복한가? 저절로 미소가 번진다.
퇴근 후 싱크대에서 갑자기 물이 샌다. 검색해서 업체를 섭외한다. 당장 못 온단다. 갑자기 화가 치민다. 그때 액정에 어머니 번호가 뜬다. 받자마자 내일 와야 한다고, 다리가 아파서 병원을 혼자 갈 수 없다고 짜증을 낸다. 그래 그러면 그렇지. 머릿속으로 내일 업무 일정을 어떻게 조정하고 병원에 모시고 갈지를 궁리한다. 마음속 작게 타오르던 불꽃이 파스스 꺼진다.
중년은 사는 것이 재미가 없다. 재미란 자고로 저절로 흥이 나는 것 아니던가. 조금 흥이 날라치면 귀신같이 알고 일상 근심이 자잘하게 덮친다. 쉴 틈 없이 '흥 모드'에서'의무 모드'로 넘어간다. 자주 겪어내는 일인데도 순간 평정을 잃는다. 평정심은 언제 생기는 건지... 오히려 좀 두려워진다.
'이러다가 또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겠지.' 무의식적으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길 바라게 된다. 점점 방어적으로 태도가 변한다.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된다. 매사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질 뿐이다.
젊었을 때는 일단 저질러 보고자 하는 호기심이 샘솟았다. 자다가 누우면 내일 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을 만큼 두근 걸렸고 잠을 설쳤다. 대부분 일이 처음이고 일어날 변수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저질렀다. 그래서 시간의 많은 부분이 놀이에 가까웠다. 놀이는 '그냥'이다. 그냥 재미가 있었다.
중년도 잠을 설친다. 걱정으로. 가끔 호기심 어린 대박 아이디어가 떠올라 회사를 그만두자며 행복하게 잠이 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뭐 이것이 될까' 하는 싸한 기분이 된다. 마음 구석으로 즐거움을 밀어내고 재미없는 회사로 달려간다.
거기다 시작하려 들라치면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안 되는 이유는 만 가지가 된다. '그래 슬럼프야. 그럴만해'로 결정한다. 슬럼프를 넘어보기 위해 모임을 나간다. 모이면 즐겁겠지 하며 조금은 기대를 걸어본다. 모임을 나가도 하는 말이 죄다 같다. 중년은 그냥 노는 것도 안된다. 돈을 들여서 놀아야 하고 모이는 데도 무슨 목적이 있다. 그냥 지루한 말들만 오고 간다. 더 이상 그냥 즐겁지 않다. 그냥 보고 싶어 만나지 않고 목적으로 만남을 이어간다.
이리저리 말에 휩쓸리다 집에 돌아오면 소진되고 피곤하다. 이렇게 살다가 끝날 것 같아 조금 억울하다. 억울한 그 마음을 돌아보자니 몸이 말썽을 부린다. 호르몬제 먹어야 하고 고지혈 약도 먹어야 한다. 점점 무기력해진다.
각자 전쟁 같은 약 30년을 겪고 여유를 찾았는데 무기력하고 재미가 없다. 다 이루어 놓았는데 하나도 의미가 없다. 어디로 가야 하지. 누굴 만나야 하지.
" 이 세상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지긋지긋하고 진부하고 단조롭고 쓸모없어 보이고만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