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 구병모
요즘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누가 슬픈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 그저 무심히 지나가는 풍경이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일렁인다. 취준생 큰딸 면접장을 따라갔었다. 면접장 복도에서 긴장한 얼굴로 중얼 중얼, 핏기도 없이 대기하는 젊은이들을 바라보다가 울컥했다. 나라는 이꼴이라도 애들은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애쓴다. 그 모습이 괜스레 미안하고, 또 대견하다.
문득 내 젊은 날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울지 않았다. 아니, 울 겨를이 없었다. 경쟁이 당연했고, 시험에 붙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과제처럼 느껴졌다. 누가 울기라도 하면 '뭐 저렇게 난리야' 싶었다. 감정이란 것은 더디게 배우는 것인가 보다. 나이 들어서야, 그렇게 울던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얼마 전 아픈 친구에게 문자로 안부를 물었다. 목소리를 들을 용기기 없었다. 방사선 치료는 어떠냐는 질문에 답이 오래도록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프고 나서, 휴직하고 나서, 그 공허함을 어떻게 메우고 있을까. 마침내 도착한 짧은 메시지에는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냥 하루하루만 살아. 억울하단 생각도 들고... 그래도 긍정적으로 지내야 약도 잘 듣잖아. 산책도 하고.”
하루하루 살아낸다는 말. 그 말이 이렇게 무겁게 들릴 줄 몰랐다. 그 무게는 곧 나이들어가는 삶의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젊을 땐 목표가 분명했다. 빨리 가야 했고, 정확해야 했으며, 일관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하루를 버티는 것이 중요한 날들이 있다. 그 하루가, 나이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제야 보인다.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 그 속에서 생겨나는 연민. 그 사람의 삶을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살과 뼈의 무게까지도 함께 느끼게 되는 감각. 노화와 소진의 표지가 하나둘 드러난 지금에서야 알게 된 것들이다. 일관성없이 느끼며 살아가는 것, 맥락도 없이 이해하게 되는 것, 나이드는 데 필요한 어쩌면 재능이다.
『파과』라는 소설 주인공 ‘할머니 킬러’ 조각이 떠오른다. 나이 들어도 여전히 무엇인가에 두근거릴 수 있다는 환타지. 어쩌면 그것이 나이드는 또 하나의 재능 아닐까.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재능을 은유로 하여, 우리는 재능의 빛과 그늘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든다는 건, 그늘마저도 내 것이라 말할 수 있게 되는 일. 그러니 오늘도 하루를 살아내며, 또 하나의 파과된 조각을 수집해 본다.
이 소설은 어쩌면 나이든 여자들의 환타지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이상하게 마음이 간다. 무언가에 다시 두근거릴 수 있다는 상상.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늙은 사람에게는 위로가 된다. 인터넷에서는 중년 여성들이 웃으며 말한다. “나도 일 그만두고 킬러나 해볼까.”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면서도, 어딘가 진심이 섞여 있는 것 같아 웃음이 씁쓸해진다.
우리는 모두 파과되어간다. 상실로, 고독으로 서서히 영혼도 마음도 조각난다. 그러나 그 조각들 속에도 여전히 경탄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 삶이란 그렇게 계속된다. 그늘도, 빛도, 재능도 모두 일관되지 않게 흘러간다. 그 불안정함 속에서 우리는 또 하루를 살아간다.
나이드는 일은 한 겹씩 일관성을 잃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모순을 인정하고 품는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재능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젊음을 부러워하기보다, 나이든 삶의 방식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 관계를 더 오래 지키려 하고, 쉽게 잊히고 싶지 않아지고, 그 모든 감정들을 품은 채 또 하루를 버틴다. 그렇게 버티며 나만의 히어로물을 만들고 주인공이 된다.
나이들어가는 것도, 하나의 재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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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소진의 표지가 이나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