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빛일지라도 우리는 무한[변지영]
" 마음을 닫기로 결심했어요. 너무 힘들어서요. 그 사람한테 기대하고 사는 것도 지치고.. 내 맘에 솔직하게 말하면 진짜 이혼할 것 같아요."
40대 중반인 그녀는 오늘 뜻밖에 결심을 선언했다. 그녀는 매사 솔직하고 감정이 투명한 사람이다. 어려운 사회생활에 그래도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몇 사람 중 하나다. 그녀는 정직하고 맑아 꽤나 재치가 있고 밝은 기운이 있어 주변에 사람들도 많다. 그런 그녀가 던진 말은 다소 충격이었다. 15년 결혼 생활 중 제일 힘들 시기라고 말하며 남편에게 냉담하기로 결심했다는 말 끝에 그녀는 내가 본 가장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힘든가 보다. 에고.. 자기한테 이런 말 첨 듣네."
"사실 남편이 싫은 건 아닌데.. 자꾸 틱틱거리고... 조금만 다정하면 좋겠는데.. 긴 말하기가 싫어서 이제 제가 마음을 접으려고요. 그러면 각자 집안 일만 의무적으로 하면 되니까요. 애들 생각하면 이혼을 그렇고... 상처받기가 싫어요. 더 이상은."
" 알지.. 그 맘... 그런데 하나만 물게.. 반대로 남편이 마음을 자기처럼 닫아버리고 냉담하길 원해?"
한참을 고민하더니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음.. 닫지는 마.. 남편한테 마음이 여전히 복잡하다는 건 사랑하는 거지.. "
"그런 걸까요?"
"내 경우에는 마음이 없으면 그저 단순하더라고. 사랑하고 아끼고 잘 지내고 싶으면 복잡해지는 것 같아. 마음 뒤로 숨고 결심 그런 거 하지 마."
이 대화 이후로 그들이 엄청 다정한 부부가 된 것은 아니지만 힘들게 서로를 봐주며 살아내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인간관계는 여전히 어렵다. 살아온 세월만큼 굴러 굴러 생활하다 보니 어릴 때보다는 억지웃음과 반 포기 상태로 인간관계를 잘 풀어가고 있다고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어디 세상사 마음과 같이 단순하던가.
여전히 부부관계는 골치가 아프고 서운하고 섭섭하다. 스트레스 풀려고 다니는 취미 생활 모임에도 다양한 감정이 얽힌다. 수영만 하면 되는 데 수영 코치님도 챙겨주어야 하고 책만 읽으면 되는 데 따로 만나 커피도 마셔야 한다. 헬스장에서 무게만 치면 될 걸 젊은 애들 운동복 운운하는 뒷담에 가담해야 할 위기도 있다. 아.. 복잡하다. 누가 나이가 들면 불혹, 지천명, 이순의 순서를 거친다고 하였나. 공자 양반, 100세 시대 중년의 복잡함을 얕보셨군요.
우리는 이렇게 복잡함을 피하려고 손쉽게 감정을 얼려 감추고 쿨하게 외롭기를 선택한다. 기운 달린다. 이 나이에 뭐 하러. 어른스럽지 못하게. 이렇게 핑계를 대지만 사실 복잡하면 골치가 아프니 내 통제 범위에 감정을 가두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통제된 인간관계는 진짜가 아니다. 관계는 단순할 수 없다. 가장 단순한 관계 특성은 수직적이다. 힘센 누군가가 지시하고 따르면 끝.. 얼마나 단순한가. 단순할수록 가짜다. 진짜 일 수 없다. 값싼 보석이 절대 오묘한 빛을 가질 수 없다. 우리가 외롭게 삶을 마무리하고자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렵지만 진짜 관계를 만들고 서로를 봐주고 곁에서 다정할 때 덜 힘들다.
진짜 관계를 위해서는 중요한 상대를 밀어내고 홀로 남아 다독이고 외로워질 것이 아니라 복잡하고 모호할 결심을 하려 한다. [순간의 빛일지라도 우리는 무한]을 쓴 변지영 작가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한순간을 무한으로 살고 있다. 복잡할 수밖에 없다. 무한한 마음과 다양한 경험이 만나 단순하게 살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중년을 망치는 무모한 모험일지도 모른다.
진짜 관계는 '통제' 밖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