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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중년 마음력 기르기 5['쓸모있음'에 반격하기]

자서전적 기억 autobiographical memory

by off

나이가 어렸을 때는 뭐든 좀 잘하고 싶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 잘하고 있나. 뭐 더 해야 하나'로 머리가 꽉 찼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이제 쓸모가 있나'가 궁금해진다. 이래저래 촘촘한 시간으로 얽힌 우리 삶은 형태만 다른 불안이 한가득이다.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연봉이나 승진, 재테크, 자녀 양육 등 미래를 향한 어수선한 마음들이 오고 간다.

그에 비해 선배를 만나면 무용담(武勇談)을 듣는다. 한때 나는 잘 나갔고 장렬히 싸웠노라. 얼마 전 모임에서 한 대학 선배는 잘 나간 한때를 한 시간 동안 상세히 설명했다. 참석한 이들은 서로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고 친한 몇은 어색한 '아 그랬어요?' 추임새를 한참 해야 했다. 그 선배의 찬란한 그 기억은 지금 이 순간을 지루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것 같은 불안을 덮고자 하는 노력임을 알아 좀 서글펐다. 나도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의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 자신이 없어 씁쓸하기도 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며 생각했다. 어중간한 나이, 늘어나는 건 새치와 주름, 뱃살인 이 나이에 어쩌자고!!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고등학교 윤리 책에 나올 법한 정체성에 대한 심도한 고민을 했다.


이 나이까지 살아 내면서 삶이 의무로 뒤섞여 나는 없고 임무나 의무만 남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갓 결혼을 했을 때는 밥솥이었다가 세탁 기고 어느 집안의 며느리였다. 직장 신입 시절 서류 뭉치였고 일 잘하는 아무개였다.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돈 아낄 때는 아줌마로 카드 힘을 빌려 어깨 힘을 줄 때는 잠시 고객님으로 살았다. 시간과 사건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비겁했었다가 맹렬했었다가 열정적이었다가 소심하였다. 삶을 타고 넘느라 몰랐다. 숨을 고르기 바빴다.

이제 거친 숨을 몰아쉬고 뒤돌아보니 이제 슬슬 겁이 난다. 더 이상 내가 어느 자리에 매김을 할 수 없을까 봐,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구박덩이가 될까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서럽고 서운하기도 하다. 열심히 살았는데,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잠시 억울하다.


넋 놓고 생각하다 무용지물을 검색했다. 장자가 쓴 말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준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무용한 것들이 사실은 끝까지 남아 본질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라 한다. 이상하고 복잡한 중년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한다. 그러다 문득 무용지물이면 좀 어떤가 하는 맹렬하고 반항적인 생각이 고개를 든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그저 나로 살면 어떤가 해본다. 이제 고만 의무를 잊어보면 어떨까 한다.


심리학 용어 중 자서전적 기억이라는 말이 있다. 전 생애를 살며 오로지 나만 아는 인생사를 말한다. 내가 직접 선별하고 내가 직접 선택한 기억이다. 모두 똑같은 일을 겪은 것 같아도 조금씩 다른 나만 아는 나가 자서전적 기억에 있다. 문득 쓸모 있음에 대한 반격으로 자서전적 기억을 떠올린다.

형제라고 하더라고 부모에 대한 추억이 다르다. 같은 일을 겪어도 내가 부여한 의미가 다르며 의미에 따라 내 삶은 다르게 살아졌다. 살아오면서 여기 이 자리까지 내가 만든 기억으로 굳건히 살고 있는 자신을 본다. 자서전적 기억을 잘 고르고 골라 의미를 만들고 나 자신의 모습을 찾으면 나이들어 하는 푸념을 덜 할 것 같다. 그래서 자꾸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오늘 모임에서 그 선배의 무용담이 무용지물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용한 태도로 보인다. 이제 그만 쓸모있고 싶다. 그저 좋은 기억들을 잘 다듬어 조용히 나이들고 싶다.

그 시절 그 기억에 내가 있었다. 기억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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