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광기’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하여
캄캄한 밤, 누군가 이웃집 현관문을 쾅쾅 두드립니다. 문을 열어보니 중년의 여성 ‘에이미(가명)’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로 서 있습니다. 그녀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비상사태! 비상사태!(Emergency! Emergency!)”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은 공포를 느끼거나 당황하여 경찰을 부를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경찰을 불렀고, 그녀는 곧바로 제압당해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약물로 ‘진정’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통제 불능의 ‘광인(狂人)’일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토론토 대학의 보니 버스토우(Bonnie Burstow, 1945-2020) 박사는 묻습니다. “정말 그녀가 완전히 돌아버린 걸까요? 아니면 혹시 우리가 그녀의 말을 읽지 못한 거 아닐까요?”
에이미가 발작을 일으키던 날은 언제나 뉴스에서 끔찍한 전쟁 소식을 접한 직후였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세상, 그 야만적인 폭력 앞에 그녀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꼈을 겁니다. 그녀에게 ‘옷’은 위선적인 문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옷을 벗어던짐으로써 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지금 세상은 비상사태”라고 절규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경찰을 부르는 대신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주고,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요?”라고 물었다면 어땠을까요? 진정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예민하게 세상의 아픔을 감지한 에이미였을까요, 아니면 타인의 고통을 ‘증상’으로만 취급해 버린 우리 사회였을까요?
보니 버스토우 박사의 저서 Psychiatry and the Business of Madness(2015)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믿어온 ‘치유’의 시스템이 사실은 거대한 ‘통제’의 메커니즘일지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왕보다 강력한 권력, 진단
버스토우 박사는 정신과 의사를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박탈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묘사합니다. 이는 과거 절대군주의 권력과 닮아 있습니다. (이 같은 혹은 이와 유사한 비유를 들었던 사람은 이 분뿐만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즈(Thomas Szasz, 1920-2012)도 그 중 한 분이었고요.)
사법 시스템에는 변호사, 배심원, 항소 절차라는 견제 장치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정신의학의 세계에서는 의사의 소견이 곧 법입니다. “자해나 타해의 위험이 있다”는 의사의 판단 하나면, 한 인간은 재판 없이도 격리될 수 있습니다. 이 막강한 권한은 국가, 경찰, 학교, 그리고 거대 제약회사가 촘촘히 얽힌 카르텔 위에서 작동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묻지 않습니다. 그 권력이 정말 정당한지 말입니다.
‘마음의 병’이라는 형용모순
우리는 몸이 아프면 엑스레이를 찍고 혈액 검사를 합니다. 하지만 우울증, 조현병, ADHD를 입증할 생물학적 지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DSM(정신질환 진단 통계 매뉴얼)은 수많은 ‘질환’의 이름을 나열하지만, 그것은 현상에 붙인 라벨일 뿐 원인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왜 잠을 못 자고 우울한가요?”
“우울증이니까요.”
“우울증인 건 어떻게 알죠?”
“잠을 못 자고 우울해하니까요.”
이것은 과학적 진단이라기보다 순환논리에 가깝습니다. 버스토우 박사는 “마음은 신체 장기가 아니기에 병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질병’이라 부르는 것들은 어쩌면 삶의 고통, 소외, 혹은 에이미의 경우처럼 ‘너무나 인간적인 반응’에 붙여진 억압의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치유인가, 아니면 영혼의 소거인가
‘치료’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일들을 들여다보면 더욱 서늘해집니다. 전기경련(충격)요법(ECT)이나 강력한 향정신성 약물들은 뇌의 기능을 억제합니다. 약을 먹고 감정이 무뎌지는 것을 우리는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말하지만, 버스토우 박사는 이를 “뇌 손상을 통한 침묵”이라고 비판합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과연 치유일까요? 아니면 그저 영혼이 마비된 것일까요?
제약회사가 후원한 수많은 연구는 부작용을 축소하고 단기적인 효과만을 강조해 왔습니다. 하지만 독립적인 장기 연구들은 오히려 약물에 의존하지 않은 사람들의 예후가 더 좋았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광기의 문해력’
버스토우 박사의 주장은 급진적입니다. 그녀는 정신의학 시스템의 개혁을 넘어, 국가 권력과의 결탁을 끊어내는 ‘폐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우리가 잃어버린 ‘광기의 문해력(Mad Literacy)’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분의 주장에 따르면, 과거의 공동체는 전문가에게만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이웃이 괴로워하면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갈등을 함께 풀었으며,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이를 품어주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 그 책임을 전문가에게 전적으로 떠넘겨 버렸습니다. 능력 혹은 책임의 ‘외주화(外注化)’라고나 할까요? 아이가 조금만 산만해도, 누군가 조금만 우울해도 우리는 서둘러 그들을 ‘환자’로 분류하고 약을 처방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해’와 ‘대화’는 사라지고 ‘처방’과 ‘격리’만 남았습니다.
물론,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삶을 지탱하는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에이미의 행동을 보며 우리가 경찰을 부르기 전에 한 번쯤은 떠올렸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치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있는가?”
진정한 치유는 진단명 뒤에 숨은 한 사람의 고유한 서사를 읽어내는 것, 그 ‘광기의 문해력’을 되찾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 글은 보니 버스토우 박사의 저서와 강연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으로서, 내용은 주류 의학계의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현재 정신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약물을 복용 중인 분들은 임의로 치료를 중단할 경우 위험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담당 전문의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영상] Bonnie Burstow - "Psychiatry and the Business of Madness"https://youtu.be/wqY9r4TZxB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