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주부생활의 시작

by 폭풍속 부푼돛

2018년 12월 셋째가 태어났다. 아내가 조리원에서의 회복기간 동안 첫째 딸과 둘째 딸의 돌봄이 필요했다.(딸딸딸의 아빠입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나는 호기롭게 얘기했다.

"내가 육아휴직할게!"

그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남성 육아휴직이 흔치 않았다. 실제 나의 육아휴직이 첫 번째라고 말하는 회사 선배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2개월이라는 시간을 '육아'보다 '휴직'에 초점을 맞춘 기대감에 나의 첫 번째 육아휴직은 매우 설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내의 부재 기간은 약 일주일 가량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요리하는 것도 즐거웠고, 청소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육아휴직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약 일주일 가량 맛본 집안일이 내 적성에 꼭 맞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육아휴직 이후, 두 번째 육아휴직은 10년 동안 고생한 아내에게 주부 휴직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다. 공무원도 합격되었겠다, 집안일에 대한 자신감도 뿜뿜 하겠다, 이런 나의 존재가 분명히 아내와 아이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구세주와 같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설레었다.

그렇게 기약 없는 나의 두 번째 육아휴직이 2020년 9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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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육아휴직의 조건은 '집안일을 전적으로 도맡아 할 것'이다. 솔직히 우리가 이런 조건을 말하거나 명문화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을 '도둑이 제 발 저린다'라고 하던가. 내가 집안일을 전적으로 도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 같다는 생각도 불현듯 든다. 더군다나 요즘 아내가 대외적인 프로젝트에 몰두를 하고 있으니 집에만 있는 내가 살림을 도맡아서 해야 한다는 당연한 의무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나는 나도 모르게 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를 보고 한숨짓는,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를 보면 화가 치솟는, 아침저녁으로 잔소리와 큰소리를 반복하는 예전 내 엄마의 모습, 이전 아내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반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견의 빈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육아휴직 초기 9월만 해도 나름대로의 포부가 있었다. 다른 육아휴직 아빠처럼 유명 유튜버를 기대하기도 하고, 회사생활에서 할 수 없는 다양한 취미생활도 기대했다. 자기 계발을 통한 또 다른 파이프라인 구축도 기대했다. '읽고, 쓰고, 사랑하라'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새로운 가치도 찾고 싶었다. 아무리 못해도, 여유시간에 책이라도 많이 읽고, 쓰면서 휴직 기간을 뜻깊게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휴직기간의 소중한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핑크빛 기대감은 무미건조한 바람으로 전락해버렸다.

아내에게는 거창하게 주부 휴직을 선사하고 집안일을 도맡아서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나를 그저 그런 주부로 만들었다. 하루의 순간순간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아침에 아이들을 보내고 잠시 쉬면 오전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린다. 점심을 먹고 애들이 와서 이것저것하다 보면 오후 시간도 훌쩍 지나가버린다. 기한이 있어서 눈 코 틀새 없이 바쁘거나 정신없이 하루가 돌아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주부의 가장 큰 힘든 점은 이러한 일상이 무한반복이라는 점이다. 넋 놓고 있다가 훅 지나가는 하루의 연속은 주부를 자괴감에 빠질 수 있겠다 싶었다. 특히나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고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부의 일상은 수면 아래의 백조의 발길질과 비슷하다. 그나마 수면 위의 백조는 우아하게 자태를 뽐내지만 주부는 그렇지도 못하다. 잘해봐야 본전, 약간의 틈만 보이면 비난을 받기 일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주부 생활을 누구나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점이었다. 호기롭게 주부를 자처한 대한민국의 가장인 나는 주부라는 복병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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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카메라 하나만 사면 안 돼?"

"뭐하게?"

"휴직기간 동안 그냥 우리 가족 일상이나 찍어보게."

"안돼. 카메라 있잖아."

"아니 그건 너무 커서 막 찍을 수 없잖아. 내가 이 카메라 사면 이렇게 멋지게 찍어주게."
인터넷의 잘 나온 사진들을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애절한 눈빛과 함께. 애절함이 통한 것일까. 예상과는 달리 아내는 다소 순조롭게 카메라 구입에 반응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때다 싶었다.

"내 육아휴직 슬로건이 '읽고, 쓰고, 사랑하라'잖아. 그래서 카메라로 일상을 찍어서 표현해보려고. 글도 쓰면서 말이야."

나의 조아리는 머리는 땅바닥까지 닿았을 것이다. 내가 사려는 카메라를 아내가 허락한다는 시나리오는 정말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카메라 사면 우리 가족 예쁘게 나오지?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주문해."

"예스! 당신이랑 아이들 진짜 예쁘게 찍어주께! 걱정하지 마."

사실 그 카메라는 인물은 잘 안 나오기로 유명하고, 풍경 전용 카메라 덕후들의 똑딱이 카메라였다. 아내가 이 글을 볼지 모르겠지만 만약 본다면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사진을 찍으러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집에서도 아내, 아이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물론 당연히 지금은 뜸하다.) 그리고 집안일 전, 후 사진을 찍어 아내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쌓여있는 설거지 사진을 찍고, 널브러져 있는 거실을 찍고, 지저분한 화장실을 찍으면서 보상심리가 작용했다고나 할까? 집안일에 대한 생색을 내고 싶은 마음이 가장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내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집 내부의 적나라한 사진을 보고 어느 누가 '우쭈쭈~ 잘했어요!' 라고 칭찬해줄까나. 하지만 옹색한 나의 마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읽고, 쓰고, 사랑하라' 라는 미명 하에, 글쓰기를 통해서 주부생활을 표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표현이 아니라 폭로가 되어 사랑하라의 마침표를 찍을 수 없을 거 같다는 고민을 심각하게 해 보았다. 아내가 이 글과 사진을 본다면? 엄마가 이 글과 사진을 본다면? 장모님이 이 글과 사진을 본다면? 정말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이런 생각도 잠시. 일단,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은밀한 주부생활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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