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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폭풍속 부푼돛 Sep 29. 2021

호모데우스, 유발 하라리

니체는 신을 죽였고 하라리는 영혼을 죽였다

유발 하라리는 확실히 문제적 작가다.(물론 나에게만)

호모데우스를 읽고 더 명확해졌다. 사피엔스를 읽으며 느꼈던 불편함을 최대한 덜어 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히려 호모데우스는 사피엔스보다 더 불편했다. 인간의 의식과 영혼은 화학적 알고리즘에 불과하고 자아도 없고 자유의지도 없다니... 욕망이나 느낌도 그냥 알고리즘의 결과일 뿐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는 지능과 의식이 분리되어 높은 지능의 알고리즘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이들이 바로 초인이고 평범한 인간은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기존의 진리를 전복시키는 메시지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냉철하게 단언하는 하라리가 미래에서 온 호모데우스 같았다. 


미래까지 뻗어가는 놀라운 통찰력과 인문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하라리의 지평은 대양과도 같다. 이런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지식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메시지에 도저히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속에서는 결같이 극소수가 세계를 지배하고 암울한 미래에 행복의 요인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책의 초반 세 가지 키워드인 '불멸', '행복', '신성'을 제시하지만 어디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볼 문제는 불멸이다. 코로나의 존재가 없었던 2017년, 이 책이 쓰였다. 코로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금, 인간의 불멸에 대해서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불멸을 논하기 전에 코로나 델타 변종 바이러스를 정복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다.(한번 삐뚤어짐의 그 끝은 어디인가)

책에서 제안하는 미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코로나는 나 같은 인간들에게는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폭주하는 열차가 탈선하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은 충분히 축복이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불편함이 니체의 책을 읽고 느꼈던 그것과 비슷했다. 19세기 "신은 죽었다" 라고 외친 니체는 기존의 신 중심의 사상을 전복시켰다. 21세기 "영혼은 죽었다"라고  외치는 하라리도 기존의 인간 중심의 사상을 과감히 전복시킨다.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인간 상상력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p.534


니체가 신을 죽였다면 하라리는 인간죽인다. 19세기에 살았던 평범한 아재가 니체를 보고 느꼈던 마음이 지금 내가 하라리를 보고 느끼는 마음일 수 도 있겠다. 이것은 단순한 불편함이라기보다는 불안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불안감, 인정하지 못하는 나름의 저항이다. 하라리가 말하는 세계에서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 내가 사는 이유, 나에 대한 고민 등 나의 정신적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

'과연 다가올 미래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내가 지금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의미한 것인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의 고리들이 불안감을 증식시켰다. 책의 모든 것들이 표지만큼이나 섬뜩하다. 불안감을 해소할만한 명쾌한 답은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이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하는 불편함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호모데우스는 사피엔스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을 연결하는 책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사피엔스는 과거, 호모데우스는 미래. 이를 통해 하라리가 말하려는 21가지 제언은 과연 무엇일까? 마지막 책에서는 꼬여있는 불편함과 불안감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길, 더불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나의  마음도 좀 더 담대해지길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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