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왠지 간만에 만트라 명상을 하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많은 불교 신자들로부터 사랑받는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집중명상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유튜브에 검색하면 흔히 나오는 반야심경 독송 음원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맞다고 간주하는 끊어읽기의 방식대로 읽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라는 구절을 '조견오온개공도 / 일체고액' 이런 식으로 읽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렇게 읽으면 뜻을 음미하면서 반야심경을 외울 수가 없다. 물론 만트라 명상이라는 것이 그 특성상 뜻을 음미하지 않고도 충분히 유의미하게 기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금 더 반야심경의 뜻을 음미하며 명상에 집중하고 싶었던 나는 더욱 나은 대안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빠르게 훑어보니까 광우스님이라는 분이 독송해주는 반야심경이 내 방식과 걸맞았다. 한동안 천수경 혹은 금강경 독송을 배경음악으로 틀거나 아니면 '윤홍식의 몰라명상' 시리즈를 유도음원으로 틀면서 명상을 하다가 간만에 반야심경을 만나니 반가웠다. 같이 명상을 하는 할머니께서도 간만에 반야심경을 듣는다며 반가워하셨다. 반야심경을 전부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대강 따라서 외울 수 있는 수준은 어느 정도 되기 때문에 즐겁게 뜻을 음미하며 외웠다. 역시 호흡 명상보다는 이와 같은 만트라 명상이 컨디션에 덜 좌우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즐겁게 반야심경을 외며 명상을 마친 이후에 문득 '공'(空)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깨닫거나 상기하게 된 바가 있었다. 적어도 반야사상을 설하는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에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 따위는 없다. 이러한 반야사상은 설일체유부의 '아공법유'(我空法有)를 넘어선 '아공법공'(我空法空)까지 급진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그렇게 주장하게 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그저 단순한 직관이었을까? 물론 지금에 와서야 양자역학의 측정 문제 등과 같은 물리학의 근본적인 연구 덕분에 '아공법공' 사상이 나름의 설득력을 얻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당시에 그들은 어떻게 현대 사람들마저 얼핏 생각해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아공법공' 사상을 어떻게 설파하게 되었을까?
그런데 이렇게 명상을 마친 이후에 고요하게 생각을 정리해보니까, 그들이 적어도 심리학적인 층위에서는 감정의 실체가 없다는 것 정도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흔히 <인사이드 아웃>이라거나 <유미의 세포들>에 나오는 장면들처럼 '기쁨', '슬픔', '분노', '사랑', '짜증' 등과 같은 '감정의 지문'이 우리의 내면에 태생적으로 탑재되어 있다가 특정 상황에 발현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올해 초에 세미나를 통해 정독한 책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따르면 우리 감정은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때그때마다 상황을 예측하고 범주화하며 적절한 감정 사례들을 '만들어낼' 뿐이다. 아무래도 반야심경의 내용을 깨닫고 설파했던 이들도 이와 같은 감정의 작동 원리를 수행을 통해 직관적으로 깨달은 것이 아닐까? 그 정도는 충분하게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 또한 명상을 하면서 그러한 깨달음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느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