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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의 꽃으로 읽는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존재와 시간

by 철학 개그 연구소



20세기를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존 서양 존재론에 대해 존재 망실의 역사라고 꼬집은 바 있습니다. 존재의 근원적 탐구에 대해 이렇다 할 물음을 제기하지 않은 채, 존재자와 존재를 한 데 묶어 규정해 온 기존 서양 철학의 부작용으로 존재가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것이죠. 이처럼 하이데거는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굳이 고민하는 인간(현존재)을 통해 무너져있던 존재론을 바로잡고 존재의 진상을 낱낱이 규명하려 했던 철학자입니다. 오늘은 서울대 필독도서에 선정되지 못한 이유가 어려워서라는 전설의 책,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해설해보려고 합니다. 다만 난해한 내용과 방대한 분량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 '꽃'을 곁들여 철학적으로 해석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용어 설명.



존재자란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개, 고양이, 태양, 티비 등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자입니다.


존재란 존재자의 근원입니다. 다르게 말해,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드는 '그 무엇'(내막)이 존재이죠.

= 기존 존재론이 존재자와 존재를 한 데 묶어 존재에 대해 탐구하다 보니 삽질을 해왔다는 게 하이데거의 주장입니다.


현존재란 실존을 문제 삼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 그냥 인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해석.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은 채 단순히 존재하고 있는 존재자들을 하이데거는 전재자라 일컫습니다. 전재자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을 의미하죠. 이를테면 도처에 널린 수많은 식물, 돌멩이, 어딘가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우리는 전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상대를 자신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 개별자 즉, 전재자로 표현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 꽃이 되었다.



현존재(인간)가 다른 존재자(사물)에게 도구적 성격을 부여하고 활용할 때,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채 객관적 사실로만 존재해 오던 전재자는 용재자로 전환됩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타자와 관계를 맺게 될 때 별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던 상대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써 다가온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화자가 존재의 지명을 한순간 도처에 널린 수많은 사람들 중 상대와 나는 유한한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특별한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관계 맺기 전과 후는 전혀 다른 의미로써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마치 지구별에서 발견한 5000송이의 장미꽃과 자신의 장미에 대한 결정적 차이를 함께 '통과한 시간'속에서 발견한 어린 왕자처럼 말입니다. 이제 상대는 더 이상 전재자가 아닌 꽃으로서 다가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인간)를 세계 - 내 -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간은 세계 안에 아무런 이유 없이 내던져진 존재자이며 나고 자란 공동체라는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선택을 할 수 없다는 현존재의 기본 전제를 뜻합니다. 즉, 인간은 세계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양한 존재자들과 관계 맺고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말입니다. 이러한 세계라는 속성을 이해한 상태에서 이름은 부른다는 것은 더 이상 평범한 존재의 지명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상대를 나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 즉, '너는 누구인가?'라는 전재자적인 물음에서 벗어나 '너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와 같은 조금 더 근본적인 의미를 묻는 것이라 볼 수 있죠.

이제 화자는 자신이 다른 존재자에게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자신 또한 의미 있는 그 무엇이 되길 희망합니다. 화자는 타자가 자신의 꽃이 되기를 희망하는 수동적이고 일방향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른 존재자들의 세계로 내던지겠다는 일종의 의지를 내비칩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입니다. 때문에 무심코 지나쳐도 아무 상관이 없는 수많은 존재자들을 돌보고 배려하길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행하는 선행이 꼭 또 다른 사랑의 확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베푸는 사랑을 좀먹고 누군가 나에게 해를 끼치는 일도, 사랑 베푸는 마음에 비아냥 섞인 조롱을 보내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이처럼 막막한 세상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연한 의지를 제안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릴 지금 이 시간을 자신의 행복과 안위만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결의. 그 의지를 잃지 않고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용재자들에게, 나를 지나치는 조금은 무의미해 보였던 전재자들에게 조금의 여유 갖고 배려와 사랑을 나눈다면..! 또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 내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인간의 이룰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이라는 걸 굳게 믿고 상대의 세계 속으로 자신을 내던질 용기를 낸다면..! 언젠가 우리의 사랑이 대물림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이죠.

무한히 존재하는 없음 가운데 '잠시 있음'이라는 가련한 인간 처지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는 '사랑'뿐이니까!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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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의 글은 학술적 접근이 될 수준이 아닙니다. 분명 그런 점에서 오류도 많겠죠. 다만 철학을 일상의 언어로 끌어오는 데에 집중한 글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 결국 사랑도 대물림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렵지만 저부터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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