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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록 Dec 23. 2020

연말 특선 영화 #3 [이터널 선샤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TV 방송을 틀면 나오는 특선영화들처럼, 매년 연말이 되면 보는 나만의 영화 리스트가 있다. 그 마지막 편을 써본다. 



*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은 감안하셔서 보시길 권장합니다.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만큼 덧없는 것이 어디 있을까. 함께하는 순간만큼은 영원할 거라 믿었던 사랑과 행복이 점점 익숙해지고 무뎌질 때쯤, 처음엔 보이지 않던 그 사람의 단점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다툼 거리가 되어가는 것. 권태기, 그리고 한때는 가장 사랑했던 두 사람이 가장 증오하는 사이가 되어 헤어지는 것. 많은 연인들의 사랑은 그렇게 끝이 나는 법이다. 여기, 우리 모두와 같이 열렬히 사랑하다 헤어진 우리와 같은 남녀가 있다. 서로를 증오하며 헤어졌던 것만큼이나 서로를 사랑했기에, 헤어졌지만 매일 서로를 그리워하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완전히 잊기 위한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


오늘의 영화 후기는 2005년 국내에 개봉한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이다. 사랑을 하고 헤어진 사람들은 그 사람을 잊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일에 집중하며 바쁘게 지낸다던지, 소홀했던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자연스레 예전 연인을 잊고 지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인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고도 생각만으로 괴로운 '옛사랑'에 대한 기억을 모두 지울 수 있다면? 조금은 엉뚱한 이런 발상에서 영화는 시작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첫 만남. 사실은 n번째 첫 만남일지도.


주인공인 조엘(짐 캐리 분)은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하던 길에, 갑작스러운 충동으로 반대편인 '몬타우크'행 열차를 타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활발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진, 조엘과는 정반대인 여자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한창 사랑이 시작되려 하는 그들의 모습이 나오다 영화의 제목이 나오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만남은 처음이 아니다. 둘은 이미 예전에 만나 사랑하다 권태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툼 끝에 헤어진 것이었다. 조엘과의 추억을 잊지 못해 괴로워하던 클레멘타인이 사람과의 기억을 모두 잊게 해 준다는 '라쿠나'에 찾아가 조엘에 관한 기억을 모조리 지우게 되었고, 조엘이 클레멘타인의 일터인 서점에 찾아갔을 때엔 조엘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녀에겐 이미 새로운 애인이 생긴 상태였다. 충격을 받은 조엘은 자신을 모른척하는 클레멘타인에게 실망하지만, 이내 라쿠나의 존재를 알게 되고 복수심에 휩싸여 본인도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는 조엘이 잠을 자는 동안 '기억을 지우는 작업'을 하면서 일어나는 조엘의 머릿속의 일들을 다룬다. 그 자신이 원해서 한 삭제 작업이었지만,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이 지워지기 시작하면서 이내 조엘은 그녀를 잊고 싶지 않아 하는 스스로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사라져 가는 그녀와의 기억 속에서 그녀를 구해낼 방법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첫 만남인 해변가로 오게 된 그들. 결국 그들의 탈출 계획은 실패했고,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잊게 된다.


기억을 잊어버리기 전 마지막 그들의 첫 만남 장소인 해변에서, '이제 어떻게 하지?'라고 묻는 클레멘타인의 물음에, 조엘이 대답한다. '그냥 음미하자.(Enjoy it)' 그리고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해변의 빈 집에서 보냈던 그들의 첫 만남의 밤을 그대로 재현한다. 다만 마지막으로 사라져 가는 기억들 사이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던 원래의 조엘과는 달리, 이번은 제대로 인사를 나눈 채로. 


그리고 다시 가장 첫 장면이었던 조엘의 아침시간을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의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모른 채로 다시 만나는 두 사람. 어찌어찌 기억을 지웠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실망감도 잠시, 다시 둘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는다. 그들의 인연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리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만날 인연은 어떻게든 다시 만난다'라는, 다소 운명론적인 진부한 이야기를 영화는 '찰리 카우프만'의 재치 넘치는 각본과, '미셸 공드리' 감독의 독특한 연출을 통해 색다른 느낌으로 풀어낸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법한 이별의 후유증을 통해, 헤어지는 순간 사랑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별의 아픔을 극복해내는 과정까지도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 바로 그 점을 말하고자 하는 거라고 나는 느꼈다. 그 과정이 없이는 성장할 수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을 갖출 수도 없는 법이다. '라쿠나'에서는 아마 이 부분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운다 해도 그 삭제하는 과정마저도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인 셈이니, 지우는 과정에서 생긴 사랑마저 지울 수는 없었던 것 아닐까.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뇌 속에서 고군분투하다 마지막에 그냥 음미하고자 했던 건, 어쩌면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만난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다시 둘을 만나게 해 줄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한다고 한다. 우리가 '잊어버렸다'라고 생각하는 기억은 사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저장된 데이터를 인출하지 못할 뿐이라고 하더라. 나에게도 한때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헤어지고 나서 지독히도 아팠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많은 기억들이 희미해져 버렸지만, 그것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리라. 첫사랑은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는 이유는 아마도 서툴렀던 사랑만큼이나 이별의 아픔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며, 그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아마도 평생의 시간이 걸리는 탓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어쩌면 아직까지 그 사람을 사랑하고(극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나오는 니체의 말을 마지막으로, 갈무리한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中



다시 시작하는 그들. 그들의 웃음은 망각한 자의 행복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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